세계화는 그동안 논술시험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다. 그럼에도 국제중학교나 영어마을, 그리고 특수목적고 설립 논란으로 그 출제 가능성은 여전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계화는 종종 서구 문명의 보편성과 우월성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으로 우리의 열등감을 부추기곤 한다. 근대화는 산업화이며 그것은 곧 서구화라는 등식 속에서 이렇다 할 만한 자부심이나 긍지를 느낄 유산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조선의 명저 14편을 다룬 이 책은 우리들의 편견을 바로잡고 세계 속의 우리를 바로 세울 기회가 된다.
공노비에게조차 80일간의 출산휴가는 물론 남편에게까지 산후 15일의 휴가를 규정한 ‘경국대전’은 시대를 앞서 간 합리성과 함께 생명 존중의 사상을 보여 준다. 이적(夷狄)을 대하는 방법은 전쟁에 있지 않고 내치에 있으며, 기강을 진작하는 데 있다는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는 동북공정과 독도 문제로 시끄러운 오늘날 훌륭한 외교 지침이 된다. 살 만한 땅이란 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택리지’의 결론은 또 어떤가?
무엇보다 이 책에서 관심을 끄는 부분은 조선시대의 철저한 기록 정신이다. ‘동방의 마르코 폴로’라 할 최부의 ‘표해록’이나 전란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인간 군상의 면모를 살핀 ‘난중일기’는 일기를 왜 써야 하는지, 기록이란 왜 중요한지를 다시금 환기시킨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에 약탈당한 외규장각의 ‘의궤’는 우리 선조들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과 그릇된 의식을 바꿔 줄 더없이 소중한 자료다.
국가 의식에 사용된 못 하나는 물론 참여 관리에서 장인, 기녀까지의 실명을 밝히고 행사의 과정을 정밀한 기록화로 남긴 것은 투명한 일처리와 더 나은 미래를 다짐하는 자부심과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가 남들의 기록 정신을 칭찬하고 치밀하지 못한 조상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우리 것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거나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덮으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오늘날 세계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세다. 그러나 세계화의 종착지는 우리여야만 한다. ‘나’와 ‘우리’가 빠진 세계화란 아무 의미 없는 일인 까닭이다. 논술도 결국에는 나와 우리, 그리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과 마음가짐을 기르는 일이라 할 때 선인들의 얼과 땀이 담긴 명저들을 통해 올바른 세계화의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문재용 서울 오산고 국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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