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고정일]백두산의 눈물

  • 입력 2006년 9월 11일 03시 05분


“우리 종성(種姓)의 근본이시며, 우리 문화의 연원이시며, 우리 국토의 초석이시며, 우리 역사의 포태(胞胎)이시며, 이미 생명의 양분이다. 나아가 백두산은 한민족을 넘어 동방원리의 화유(化(유,육))이요, 동방민물(民物)의 최대 의지요, 동방문화의 최요(崔要) 핵심이요, 동방의식의 최고 연원이다.” 백두산을 민족의 발상지로 신성화하고 멸망한 한민족이 그곳에서 소생할 것을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에서 이렇게 환희에 차 노래했다.

‘조중변계조약’은 1962년 10월 12일, 평양에서 비밀리에 북한 김일성과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사이에 맺어졌다. 그때 국경선 경계비석이 21개인데, 1∼5호 비는 압록강 발원지로부터 천지 서쪽 백두봉까지, 6∼21호 비는 천지 동쪽 능선으로부터(장군봉 북쪽 2∼3km 지점) 원지 남측 약수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중국은 6·25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대가로 북한에 백두산 할양과 압록강 두만강 북한 측 하안까지 전부 중국령에 편입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국경 하천은 물길 한가운데를 국경선으로 긋는 것이 국제적 관행인데, 이마저 무시해 버렸다.

1965년 7월 14일 인도 신문 나구타 타임스는 동베를린 주재 북한외교관의 말이라며 ‘중국 당국이 백두산 주변 영토 100평방마일을 6·25전쟁 참전 대가로 할양하라고 압박한다’고 전했다. 이에 앞서 5월 25일, 일본 NHK는 영국 선데이타임스의 홍콩특파원 기사를 인용해 중국이 북한에 백두산 영지 할양을 요구한 사실을 보도했다.

1983년 김영광 등 대한민국 국회의원들 54명이 정기국회 때 제출한 ‘백두산의 영유권에 관한 결의안’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국토는 북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해서 압록강 두만강으로부터, 남은 한라산을 시작으로 마라도까지 미친다. (중략) 그러나 1950년대 북한과 중공(중국) 국경분쟁 이후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백두산 천지가 남북으로 양분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중략) 이에 대해서 민족적인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를 주권 침해인 국가적인 중대사로 단정하고, 여기에 남북한 6000만 민족의 이름으로 대한민국 영유권을 정당히 밝히고자 한다.(후략)”

그러나 국회 토의는 공전되어 결국 채택되지 못하고 끝났다. 정부 측 답변은, 당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이 진행 중이므로 필요 이상 자극을 주는 일은 이득이 없고 북과의 대화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적극적인 의사 표시를 기피했다.

국경 분쟁과 영토권 문제는 국제법과 역사적인 실증에 기초해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에 대해서는 남북한 당국의 기피로 민족적인 합의가 구축되어 있다고 할 수 없어 안타깝다.

중국은 내년 1월 동계 아시아경기대회 성화를 9월 6일 백두산 천지에서 채화해 백두산이 자국의 영토임을 세계에 각인시키고 있다. 이제 그들의 역사 왜곡 작전인 동북공정은 백두산 고구려를 넘어 한강 유역까지 손을 뻗치고 있다. 남북한 당국은 민족끼리, 자주국방 어쩌고 하기에 앞서 민족 앞에 죄악사가 될지도 모를 막중한 책임을 두고 어찌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최남선의 정신 차리라는 서릿발 분노와 경계 외침이 들려온다. “백두산을 잊어버린 조선 사람들아. 개구리밥 같고 버들개지 같이 닿은 데와 박힌 데가 없는 오늘날 조선 사람에게 화 있을진저.”

고정일 소설가 동서문화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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