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③日대신 한국이 분단된건 아닐까

  • 입력 2004년 8월 29일 18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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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과 동시에 허리가 동강난 한반도. 도대체 38선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이 물음은 너무 낡아서 다시 제기할 가치조차 없어 보인다. 국내외에서 권위 있는 연구도 많이 나왔고 결론도 내려진 것 같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까지도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은 궁금한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38선은 얄타에서 결정됐을까, 포츠담에서 논의됐을까. 아니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미국과 소련의 전략적 필요에 따라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또 전쟁 도발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전승국의 공동 점령이라는 응징을 당했는데 왜 같은 입장인 일본은 그것을 면할 수 있었을까. 그 대신 엉뚱하게 식민지 조선이 희생양이 된 것은 아닐까. 하나하나 따져보자.》

●‘얄타 密約說’은 사실이 아니다

첫째, 1945년 2월 소련의 얄타에서 열린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정상회담에서 미소(美蘇)가 코리아를 남북으로 나누기로 했다는 이른바 ‘얄타 밀약설’이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얄타회담 기록은 비밀문서까지 모두 공개됐으나 어느 구석에도 그런 합의가 나오지 않는다.

둘째, 1945년 7월 17일부터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군사지도자회담에서 한반도 분할점령이 합의됐거나 최소한 논의됐다는 설이다. 이는 일정한 근거를 갖고 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수행해 이 회담에 참석한 미군 지도자들의 회고가 그것이다. 그들은 “일본군을 궤멸시키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코리아에 공동으로 진공하는 경우에 대비해 미군 지도부가 육상 작전구역을 나눠본 적이 있는데, 그 분계선이 대체로 38선에 근접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츠담회담에서 미국과 소련이 38선 획정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거나 합의한 것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관련 자료들을 검토해 보면 포츠담에선 코리아의 분단이 전혀 논의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심증이 강하게 든다.

●8월 10일부터 15일 사이의 비극

‘얄타’에 간 루스벨트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얄타에서 열린 연합국정상회담에 참석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대원수(왼쪽부터). 전후 처리의 기본방침을 협의한 이 회담의 정식 명칭은 크림회담이다. 사진 출처는 미 해군 해양사센터.

얄타회담 때 미국 대통령은 대소(對蘇) 유화론자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였으나 포츠담회담 때는 대소 강경론자인 트루먼으로 바뀌었다. 게다가 포츠담회담 때는 미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해 힘으로 소련을 누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터라 굳이 소련에 뭘 나눠주겠다고 새롭게 약속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트루먼은 불과 5개월 전에 루스벨트가 대일전(對日戰) 참전 대가로 소련에 보장한 것들 가운데 적잖은 부분을 철회하고 싶어했다.

1945년 8월 2일 끝난 포츠담에서도 한반도 분할점령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38선이 그어진 시기의 범위는 아주 좁혀진다. 널리 알려진 대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한반도의 북변 항구들에 진공하기 시작한 8월 10일부터 일제가 항복을 선언한 15일 사이였을 것이다. 당시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자고 제의한 쪽은 미국이었고 소련 영국 중국(국민당 정부)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미국은 뒷날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미군은 오키나와에 주둔한 병력인데 비해 소련군은 이미 함경도에 들어간 상황에서, 소련군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는 것을 막으려면 서울을 확보할 수 있는 38선에서 한반도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이는 38선이라도 설정해 그 이남을 미군이 점령하지 않았다면 한반도 전체가 소련의 수중에 들어가 공산화됐을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일본을 욕심낸 소련의 南進 중단

‘포츠담’에 간 트루먼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연합국 회담에선 독일에 대한 4개국의 분할 점령 방침이 정해지고 일본에 대한 항복 요구를 담은 포츠담선언이 발표됐다. 왼쪽부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대원수. -동아일보 자료사진

미국의 해명대로라면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당시 소련은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도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38선에서 남진(南進)을 멈췄을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그동안 두 개의 엇갈리는 해답이 제시돼 왔다.

첫째, 소련의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련으로서는 8월 15일 현재 겨우 북위 41도선 정도까지 진공하지 못한 형편에 38도선 이남까지 욕심을 내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라는 분석이 곁들여진다.

둘째, 그때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일본열도 전체를, 아니면 최소한 홋카이도(北海島)만이라도 미국과 공동 점령하고 싶어 했는데 그 ‘큰 떡’을 나눠 먹으려면 한반도라는 ‘작은 떡’을 놓고 미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계산해 더 이상의 남진을 자제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두 번째 해석을 받아들인다.

●일본 분할 간청을 거절한 트루먼

제2차 세계대전을 매듭지으면서 전승국들은 전쟁 도발국들에 공동 점령의 응징을 가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대한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의 공동 점령이 그 대표적 보기였다. 다만 이탈리아는 1943년 7월 내부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를 타도하는 운동이 일어나 그를 내쫓고 곧바로 연합국에 항복했기에 국토 전체가 공동 점령당하는 무거운 징벌은 모면하고 대신 일부 지역이 잠시 공동 점령당하는 가벼운 징벌을 받는 데 그쳤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다른 새로운 각도에서 한반도 분단 문제에 접근하게 된다. 그것은 “어째서 일본은 분단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아시아에서는 마땅히 일본이 공동 점령의 응징을 받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스탈린은 그런 맥락에서 트루먼에게 일본 점령에 참여시켜 달라고 요구했지만, 트루먼은 스탈린의 간청을 매정하게 거절했다. 트루먼은 장차 태평양지역에서 미국 안보의 초석이 될 나라는 일본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일본을 독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인류 역사상 최초로 원자폭탄 세례를 받았지만 공동 점령을 면제받는 은혜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만약 일본이 연합국의 공동 점령을 받고 그래서 종국적으로 분단의 비운을 겪게 됐다면 전후 일본은 물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엉뚱하게 족쇄가 채워진 한반도

어쨌든 공동 점령의 족쇄는 엉뚱하게 한반도에 채워졌다. 그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공동 점령을 거부한 대신에 한반도의 공동 점령을 허락함으로써 소련의 불만을 무마하고자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소련에 있어서 한반도의 북반부가 일본의 일부를 대신할 만한 가치가 있었느냐는 것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결론은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때 동북아에서 스탈린의 1차적 관심은 일본이 다시는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러시아에 위협이 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이 한반도의 북반부를 점령해 친소(親蘇)국가를 세워놓으면 일본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다.

이렇게 볼 때 한반도가 분단되는 과정에는 일본이라는 변수가 결정적 작용을 했다. 일본을 둘러싼 미-소의 상반된 이해가 우리 민족의 불행을 초래한 셈이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은 일제 식민지배의 또 다른 잔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과 소련이 주된 책임을 벗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영국과 중국 역시 부차적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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