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⑧분단, 언제 굳어지기 시작했나

  • 입력 2004년 10월 10일 18시 34분


'국경 아닌 국경' 38선
'국경 아닌 국경' 38선
《일제의 패망 직후 한반도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분단됐을 때 한민족은 그것을 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미국과 소련 모두 “일본군의 항복 접수를 쉽게 하기 위해 임시방편으로 분할선을 설정했다”고 설명했기 때문이다. 한민족의 기대와 희망은 얼마 가지 않아 무참하게 짓밟혔다. 38선이 그어진 지 3년 만에 미군이 점령한 남한엔 대한민국이 서고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섬으로써 분단이 고착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된 분단구조는 오늘날까지 한민족에 질곡이 되고 있다.

38선은 어떻게 ‘국경선 아닌 국경선’이 되고 말았을까? 이에 대한 학계의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대체로 어느 한쪽에서는 1945년 10월 하순부터 11월 중순 사이에 미국이 남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때부터 분단이 굳어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분단 고착화의 1차적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보는 것으로, 한때 남한 학계에서는 이 같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고르바초프 정권이 개혁과 개방을 지향한 이후 소련의 관련 문서들이 계속 공개되면서 미국책임론은 근본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미국책임론 뒤엎는 소련 자료들

지난 10여년 사이에 새롭게 발굴된 소련 자료들을 근거로, 1945년 9월 중순부터 하순 사이에 소련이 북한에 단독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함에 따라 이때부터 분단이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이 같은 해석에 따르면 분단 고착화의 1차적 책임을 소련에 묻게 된다.

1945년 8월 말경 북한에 진주한 소련점령군을 열렬히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 분단은 잠정적인 것이라 믿었던 그들의 기대와 희망은 사실 그때부터 짓밟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점령군은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아 북한에 소비에트정권을 세우려는 구상을 문서화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우선 1945년 9월 14일 소련점령군사령부의 정치부가 작성한 ‘독립조선의 인민정부 수립요강’이라는 문서를 살펴보자. 이는 소련 점령군의 북한 진주가 완료된 뒤 소련 정부의 북한정책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문서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6개항으로 된 이 문서는 북한에 ‘노동자와 농민 대표들의 소비에트’ 곧 노농(勞農)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소련이 이미 그때부터 북한에 공산정권을 세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스탈린이 소련군 최고사령관 자격으로 북한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담은 비밀지령을 소련점령군사령부에 내려보낸 것은 엿새 뒤인 9월 20일로 영국 런던에서 미영소 3개국의 제1차 외상회의가 열리고 있던 시점이었다. 김일성과 그의 빨치산 동지들이 원산에 도착한 바로 다음날이기도 했다. 1993년에야 비로소 그 전문이 공개된 이 비밀지령은 소련 점령군의 9월 14일자 요강과는 일단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북한에 소비에트 제도를 도입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이다.

●북한 진주와 함께 드러난 蘇 의도

스탈린은 그 대신 “반일적이며 민주적인 정당들과 단체들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스탈린이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정권을 세우라고 한 점이다. 일본의 대표적 러시아 전문가인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는 “이 지령은 스탈린이 처음부터 북조선 단독정권의 수립을 지시했음을 보여주는 극히 귀중한 문서”라며 “이 지령이 내려간 시점부터 분단 움직임이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논평했다.

미국의 대표적 북한 연구자인 이정식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도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이 지령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과의 협의 문제나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오직 북한에 부르주아 민주정권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만 언급한 데 주목하면서 “한민족이 일제로부터 광복을 맞은 지 37일 만에 내려진 이 지령은 한반도 분단을 고착화하는 것으로, 남북의 재통합을 위한 모든 노력을 허구적으로 만들어버렸다”고 논평했다.

모스크바에서 발굴한 소련 문서들을 기초로 소련의 북한정책을 분석해 박사학위를 받은 전현수 경북대 교수도 같은 논리를 폈다. 그는 소련이 한반도 분단 고착화에 앞장섰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북한에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뜻을 담고 있는 스탈린의 지령을 비밀문서로 분류했을 것으로 보았다.

●박헌영의 타협과 ‘북부조선분국’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대중집회장에 조만식(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소련점령군의 레베데프 소장(오른쪽에서 세번째)이 나란히 참석했다. 그러나 소련점령군은 이 행사 전날 이미 북한을 통할하는 임시중앙기관을 평양에 창설하는 방안을 본국 정부에 제의해 놓고 있었다.-동아일보 자료사진

스탈린은 또 이 지령에서 하바로프스크에 본부를 둔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가 북한의 민간행정을 지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모스크바의 소련군 군사평의회는 정치공작을 담당하는 제7부의 차장 사포즈니코프를 하바로프스크에 보냈다. 그는 그해 9월 하순 연해주군관구 정치부 차장 바빌로프 대령 및 정치부 제7과장 메클레르 중령 등과 함께 평양에 도착했다.

그들은 평양의 소련점령군사령부에서 정치공작을 지휘하는 그로모프 대령과 함께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조선공산당 본부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기거나 평양에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을 발족시켜 조선 전체의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하고 통제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만만치 않은 난관에 부닥쳤다. 박헌영을 비롯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조선공산당이 그 계획에 맹렬히 반대한 것이다.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은 특히 평양에 독자적인 조선공산당을 세우는 것은 분단 고착화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며 강력히 저항했다.

그러자 이 위원회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조선공산당 본부는 서울에 그대로 두되 평양에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박헌영은 처음엔 이 타협안도 거부했으나 소련 점령군의 끈질긴 회유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해 10월 13일 결국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을 세운다는 공식 결정이 내려졌고, 이처럼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정치조직이 만들어지면서 분단 고착화는 더욱 현실화됐다.

●‘북한의 태아적 정부’ 출범과 미국

비슷한 시점인 10월 8일부터 11일까지 소련점령군사령부는 평양에서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소집했다. 당시 북한에선 38선으로 분단된 강원도와 경기도를 독자적인 도(道)로 인정하지 않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 황해도만을 ‘북조선 5도’라고 불렸다. 이 회의가 끝난 직후인 10월 13일 소련점령군사령부는 ‘평양에 북조선 전체를 통할하는 임시중앙기관을 창설할 것’을 본국 정부에 제의했다.

이에 모스크바의 외무부와 국방부가 협의를 거쳐 ‘평양에 북조선임시민정자치위원회를 구성하라’는 지령을 내려보낸 것은 10월 17일이었다. 이 지령은 위원회 산하에 산업국 농업국 상업국 재정국 교통국 체신국 교육국 보건국 보안국 사법국 등 10개 행정국을 설치하라는 세부지침까지 담고 있었다.

11월 19일까지 위원회와 산하 10개국의 조직이 완료됐다. 이로써 로버트 스칼라피노 미국 버클리대 명예교수와 이정식 박사가 지적했듯이 ‘북한의 태아적 정부’가 출범했다. 그것은 북한에 분리적 국가를 수립하는 첫걸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군정과 국무부는 북한에서의 이러한 정치적 전개를 보고서야 남한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고려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분단 고착화 조치를 처음 취한 쪽은 소련이었다고 하는 게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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