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⑨1차 전문가 좌담<上>

  • 입력 2004년 10월 17일 18시 47분



《본보의 ‘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 시리즈는 8월 16일부터 10월 11일까지 8회에 걸쳐 한반도 분단을 둘러싼 논란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그해 9월 20일 평양의 소련점령군사령부에 내려온 스탈린의 비밀지령까지 살펴봤다. 시리즈 중간점검을 위해 아직도 논쟁이 뜨거운 이 시기에 대한 전문가 좌담을 마련했다.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명예교수, 전현수 경북대 교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의 좌담 요지를 2회에 나누어 싣는다.》

▽이정식 명예교수=내가 한국공산주의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57년부터였다. 늘 아쉬웠던 것이 소련문서를 보지 못한 점이었다. 소련문서를 보면서 지난 세대의 연구에 대해 어떤 점을 재고해야 한다고 보는가.

▽전현수 교수=냉전시대의 상당히 많은 연구가 이데올로기적 족쇄에 속박돼 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한 그 시대의 북한 연구는 개인 체험과 결부돼 있다. 그 때문에 객관적 사실을 담담하게 연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1973년 ‘Communism in Korea’라는 내 책이 출간됐을 때 한국에서는 그것을 금서로 분류했다. 그런데 1980년대 (한국에서) ‘김일성 선집’을 그대로 읽을 수 있게 되자 내 책은 오히려 반동적인 것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요새 다시 태도가 달라진 것 같은데….

▽전=1980년대 ‘북한 바로 알기’ 차원에서 북한의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여과 없이 확산됐다. 그와 함께 북한의 주장에 맹목적으로 경도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너무 억눌려 있던 것을 갑자기 놓아버리니까 왼쪽으로 확 휜 셈이다. 중심을 잃었다가 1990년대를 지나면서 다시 균형을 회복하고 있다고 본다.

▽안드레이 란코프 초빙교수=나도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는데, 한국 학생운동과 러시아 학생운동은 달랐다. 여기 학생들은 자본주의 분위기에서 자라나서 북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1980년대 소련 학생들은 공산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면서 북한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소련과 북한이 동맹관계에 있으니까 소련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동정적일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때는 김일성 체제에 대해 다들 가장 악독한 독재라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사고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스탈린이 과연 1945년 8월경에 한국정책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란코프=소련자료에서 그런 준비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1945년 4, 5월경 소련에 있는 고려인 공산당원이 몇 명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한반도를 통치할 때 이 사람들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다른 자료는 없다. (한반도 진공작전에 투입된 소련군) 제25군에도 한국사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통역요원도 부족했다. (당시 소련의 한국정책이 있었다면) 한반도에 소련과 관계가 좋은 정부가 들어서면 좋겠다는 구상 정도였을 것이다. 소련은 아마 군사적으로 승리하는 것에 더 몰두한 듯싶다.

▽이=미국도 똑같은 문제를 갖고 있었다.

▽전=미국도 한반도에 관한 구체적 정책대안이 없었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전략의 큰 틀에서 신탁통치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미국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 이후 국무부 관료들과 학자들 간에 극동정책 토론이 시작됐다.

▽전=미국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후(戰後)구상위원회’가 결성돼 학자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늦게나마 소련도 극동지역에 대한 전후계획 마련을 위해 비슷한 기구를 설치했으나 현재로서는 구체적 활동내용을 알 수 없다.

▽이=소련에 있어 한국은 1차적 관심이었나, 2차적 관심이었나?

▽전=포츠담군사회의에서 만주공격작전을 구상했을 때 한반도 북방 항구에 대한 보조계획을 구상한 것은 말 그대로 보조적이었다. 소련은 만주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이권을 챙기는 데 우선적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대일전에 참여해서 만주에서 군사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은 전후 한국문제 처리에 개입할 수 있는 개연성을 높였다. 1946년까지 서울에 소련총영사관이 있었는데, 소련총영사관은 1930년대에도 서울의 정치 경제 문화 상황을 예의주시해서 모스크바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다.

▽이=스탈린은 세계적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구상하는 인물로 그의 주적(主敵)은 미국이었다. 소련의 한국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비밀지령인데, 그 지령이 나온 배경도 미국과의 대결관계였다. 특히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스탈린은 미국을 몹시 경계했다. 그는 일본 점령 공동 참여를 집요하게 요구했다. 그는 8월 15일 “일본 홋카이도 북반부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소련의 여론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너희가 총을 가지고 들어온 조선은 갈라주지만, 일본은 너희 군사가 한 명도 상륙하지 않았는데 왜 주느냐”며 반대했다.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라는 9월 20일 비밀지령은 미국과의 대립관계 때문에 내렸다고 본다.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반소적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스탈린이 이런 지령을 내렸다고 보는데 그건 지엽적인 문제다.

▽전=1945년 6월 소련 외무성에서 작성한 문서는 한반도가 외국의 수중에 들어가 소련을 공격하는 발판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반도가 일본의 수중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소련은 일본을 폐허화하려고 했다.

▽전=소련은 전후 일본 관리에 미국과 동일지분으로 참여하고자 했으나 미국은 “절대 안 된다”고 버텼다. 그러자 소련은 점령지역만이라도 확실히 장악하려고 했다. 즉, 전후 일본관리에 대한 참여가 봉쇄되면서 북한만이라도 세력권으로 굳히려 한 것이 9월 20일 비밀지령을 내린 이유라고 생각한다.

▽란코프=말씀하신 대로 (소련으로서는) 미국정책이 가장 중요했다. 당시 소련이 아주 무서워했던 것은 일본의 재등장이었다. 이런 일본 공포로 인해 1950년대 초까지 신경을 썼다. 소련은 민주화된 일본도 위협으로 여겼다. 소련에 있어서 한반도는 미국과 관계가 나빠졌을 때 일본의 공격길을 막을 수 있는 전략지역이었다.

▽이=1945년 9월 미군이 한국에 상륙한 직후 하지 장군은 이미 북한에 들어와 있던 소련군 사령관에게 연락해서 연락장교를 교환하기로 했다. 소련군 장교들이 서울로 오고 미군장교들이 평양으로 간 게 9월 20일이었다. 그런데 2주일 후 갑자기 소련점령군은 상부의 지시를 이유로 소련과 미국의 관계정립 전에는 연락사무가 필요 없다며 연락장교들을 철수시키자고 나왔다. 이것도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진 데 따른 것 아닌가. 그래서 9월 20일 비밀지령이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스탈린에게는 대미전략이 가장 중요했고, 그 연장선에서 소련의 한국정책이 결정됐다고 할 수 있다.

▽란코프=소련은 1946년 봄까지 미국과 어떤 협약도 필요 없었다. 소련이 처음부터 맞출 수 없는 조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세운 것은 ‘한반도 전체에 대한 절반의 통치보다는 절반에 대한 완전한 통치가 좋다’는 사고변화 때문이었다.

▽전=9월 20일 비밀지령 이후 10월에 열린 ‘북조선 5도인민위원회 연합회의’에서 행한 치스차코프 대장의 연설은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세우라는 지시를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북한을 독자적인 정치경제적 단위로 분리해서 북한의 행정과 경제를 관리할 최고기구를 만들고 그 산하에 10개의 중앙행정부서를 만들어 소련점령군 사령부가 지휘하는 시스템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9월 20일 비밀지령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10월의 상황 진척은 (북한에) 독자적 중앙집권적 국가기구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좌담 참석자 프로필▼

▽ 이정식 교수

1931년 평남 안주 출생

195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정치학 학·석사

1963년 버클리 캘리포니아대(UC Berkeley) 정치학 박사

1963년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현 명예교수

1974년 미국정치학회 최고저작상 수상

현 경희대 NGO대학원 초빙 석학교수

저서 ‘한국공산주의의 기원’(공저 1959년), ‘한국공산주의 운동사’(공저 1973년), ‘만주에서의 혁명적 투쟁’(1983년)

▽ 전현수 교수

1961년 서울 출생

1984년 성균관대 사학과 졸업

1992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석사

1998년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 아시아 아프리카대 역사학 박사

2001년 경북대 사학과 교수

저서 ‘소련군정 시기 북한의 사회경제개혁’(1997년)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와 신국가건설’(공저 1997년), ‘북한 현대사 문헌연구’(공저 2001년), ‘소련군정 문서, 남조선정세보고서’(번역 2003년),‘북한 현대사’(공저 2004년)

▽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196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1986년 레닌그라드국립대 졸업

1989년 레닌그라드국립대 한국역사박사

1996년 호주국립대(ANU) 한국학 교수

현 국민대 국제학부 초빙교수

저서 ‘From Stalin to Kim Il Sung’(2002년), ‘Crisis In North Korea:The Failure of

De-Stalinization, 1956’(2004년 12월 출간 예정)

특별취재팀 전화 : 02-2020-0235, e메일 : 81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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