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5년사 쟁점 재조명]<1부>⑬소련은 왜 일사불란했나

  • 입력 2004년 11월 14일 18시 03분


日帝로부터 행정이양 받는 蘇軍1945년 8월 북한에 진주한 소련극동군 연해주군관구 제25군사령관 이반 치스치아코프(왼쪽)가 일제의 평안남도 지사였던 후루가와(오른쪽에서 두번째)로부터 행정이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중요한 정치문제는 치스치아코프가 아닌 제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제프의 손에서 결정됐다. ‘사진으로 보는 남북관계 55년사’에서 발췌한 사진. 사진제공 북한문제연구소
日帝로부터 행정이양 받는 蘇軍
1945년 8월 북한에 진주한 소련극동군 연해주군관구 제25군사령관 이반 치스치아코프(왼쪽)가 일제의 평안남도 지사였던 후루가와(오른쪽에서 두번째)로부터 행정이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중요한 정치문제는 치스치아코프가 아닌 제25군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제프의 손에서 결정됐다. ‘사진으로 보는 남북관계 55년사’에서 발췌한 사진. 사진제공 북한문제연구소
● 스탈린의 충복인 軍部 정치장교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소련에서 스탈린의 위신은 급상승했다. 나치 독일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을 패망시킨 ‘위대한 수령’으로 떠받들어진 것이다. 농민의 집단화 과정에서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자’ 또는 숙청이란 명목으로 수많은 정적들과 당원들을 처형한 ‘독재자’의 이미지는 사실상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하고, 그 대신 ‘조국 수호의 대영웅’이라는 새로운 이미지가 확실하게 굳어졌다.

스탈린은 이처럼 강화된 위신을 통해 군부와 당의 충성심을, 특히 군부의 충성심을 거의 완벽하게 확보했다. 소련 군부에서는 군사위원이라고 불린 정치장교의 영향력이 매우 컸는데, 스탈린은 이들을 통해 군부를 장악했다. 소련군 중앙본부의 총정치국이 각급 군부대에 배치한 군사위원들은 일선에서 직업군인들을 통제하고 때로는 지휘하기도 했다.

● 사실상 북한총독이었던 스티코프

스탈린의 뜻을 충실하게 집행하는 소련군 총정치국의 위세는 막강했다. 군사위원들은 총정치국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복종했다. 소련군이 주둔한 국가의 문제에 대해서는 소련 외무부도 총정치국의 보고서와 판단서를 반드시 살핀 뒤 총정치국과 협의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중앙과 현지 사이에 정책상의 차이나 혼선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총정치국장은 스탈린의 심복 중의 심복인 요시프 슈킨 육군중장이었고,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의 극동군 연해주군관구 예하의 제25군을 직접적으로 지휘한 사람은 연해주군관구의 군사위원 테렌티 스티코프 상장이었다. 정치장교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 바로 대장과 중장 사이의 상장이었는데, 그때 소련군 전체에서 상장의 지위에 있던 사람은 스티코프를 포함해 4명밖에 없었다.

● 공산당 2인자의 사위로 벼락출세

스티코프는 당시 소련공산당에서 제2인자의 지위에 있던 안드레이 주다노프의 사위여서 더욱 영향력이 컸다. 고향인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관차 수리공장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22세 때인 1929년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시당에 입당했다. 그는 곧 레닌그라드시당 제1서기이자 중앙당 정치국원으로 스탈린의 충복인 주다노프의 눈에 들어 그의 사위가 되고 레닌그라드시당 제2서기로 벼락출세를 했다.

흐루시초프의 표현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기초적인 군사훈련조차 받아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든든한 배경 때문에 1939년 핀란드와의 전쟁에 투입된 제7군의 군사위원으로 승진했다. 그리고 이 전쟁에 승리한 소련은 핀란드에 친소괴뢰정부를 세웠는데, 이 과정에 스티코프가 깊이 개입했다. 그때의 경험이 북한에 친소국가를 세우는 데 참고가 됐을 것이다.

● 레베제프는 스티코프의 직계였다

스티코프는 레닌그라드전선의 군사위원을 비롯해 핵심부대의 군사위원을 차례로 역임한 뒤, 북한을 포함한 극동지역을 관할하는 연해주군관구의 군사위원으로 전임됐다. 2차대전 종전 당시 그의 나이는 38세. 김일성보다 5년 위였다. 그 스티코프가 북한을 점령한 제25군의 군사위원 니콜라이 레베제프 육군소장을 직접 지휘했다. 당연히 북한에서 중요한 정치문제는 점령군사령관 이반 치스치아코프 손에서가 아니라 레베제프의 손에서 결정됐다.

치스치아코프가 처음 평양에 도착해서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곧 부임할 레베제프 소장에게 물어보라”고 말했던 것은 바로 그 점을 증명했다. 농민의 아들인 레베제프도 19세 때 소련군에 입대한 뒤 줄곧 정치장교의 길을 걸었다. 소련과 핀란드의 전쟁 때 상급자 스티코프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추천으로 키예프특별군관구의 군사위원으로 승진했다. 레베제프는 스티코프의 직계였던 것이다.

● “스티코프 없이 이뤄진 조치란 없다”

레베제프는 제25군의 군사위원으로 전임된 지 4년째나 돼 극동 사정에 밝았다. 그의 부인도 간호원으로 종군했다. 그런 레베제프가 뒷날 스티코프에 대해 “그가 조선에 있건 연해주군관구에 있건 또는 모스크바에 있건 간에 그의 참여 없이 북조선에서 이뤄진 조치란 하나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소련 점령하에 북한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스탈린의 의지를 철저히 받들었던 스티코프의 뜻과 구상에 따라 움직여졌다는 얘기였다. 스티코프는 ‘북한 주둔 소련총독’이나 다름없었다.

레베제프의 보좌진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게라심 발라사노프 대령이었다. 아르메니아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국가보안위원회(KGB)의 전신인 국가공안부(MGB) 소속으로, 일본 주재 소련대사관에서 근무하면서 ‘극동전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거기에 힘입어 그는 MGB의 북한지부장으로 임명됐다.

● 서울의 정보요원 샤브신과 박헌영

MGB 요원으로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관의 부영사라는 대외직명을 가지고 활동하던 아나톨리 샤브신도 발라사노프의 지휘를 받았다. 1939년 서울에 개설된 소련총영사관은 일제가 패망한 이후에도 유지됐는데, 샤브신은 1940년부터 이곳에 근무하며 조선을 깊이 연구했다. 조선어에도 능통해 최초의 ‘러-조사전’을 출판하기도 했다. 스티코프는 “나는 샤브신만큼 조선을 잘 아는 사람을 이제까지 본 일이 없다”며 격찬하곤 했다.

샤브신은 서울과 평양을 왕래하며 남한정세를 레베제프에게 보고하고 레베제프의 지시에 따라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을 움직이기도 했다. 샤브신은 일제 때도 지하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박헌영이 곧바로 찾아가 대책을 협의한 사람도 샤브신이었다. 샤브신의 부인으로 총영사관 도서실장을 지낸 파냐 샤브시나는 나중에 한국에 대한 책들을 써 소련에서 ‘한국학의 대모(代母)’로 불렸다.

● 메클레르 중령은 ‘김일성 담당관’

레베제프는 더욱 실무적인 정치공작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스티코프에게 적임자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스티코프는 연해주군관구의 정치장교 그리고리 메클레르 중령을 보냈다. 모스크바대 역사철학부 출신으로 1935년에 정치장교가 돼 정치공작가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1945년 9월 초 평양에 부임하자 곧바로 김일성과 조만식을 만났다. 그는 주로 김일성을 담당해 소련군 내에서는 ‘김일성담당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는 또 비밀리에 방북하는 박헌영을 만나 의견을 청취하고 소련점령군의 의도를 전달하기도 했다.

소련은 이처럼 스탈린→소련군총정치국(슈킨)→연해주군관구(스티코프)→제25군(레베제프)으로 이어지는 지휘명령계통을 유지하면서 한반도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특히 슈킨, 스티코프, 레베제프는 모두 스탈린에 버금가는 실세인 주다노프에 연결된 사람들이어서 ‘즈다노프 패거리’로 불렸다. 바로 이 점 때문에도 그들은 호흡을 같이할 수 있었다.

특별취재팀 전화 : 02-2020-0235, e메일 : 81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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