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포럼]신일철/일본의 양심에 기대한다

  • 입력 2001년 6월 7일 18시 32분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의 법정을 방청한 20세기의 걸출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피고의 지독한 ‘무사상성’에 놀랐다고 썼다. 아이히만은 권력의 명령에 복종한 일개 소시민에 불과했고 악한이라기보다는 사고능력이나 양심도 없이 권력에 대한 충성밖에 몰랐던 하수인인 것을 간파했다. 그래서 아렌트는 그의 범죄에 대해 ‘악의 진부성’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무사상의 대중을 만들어낸 전체주의 체제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日정치인 無사상성 놀라울 뿐▼

근래 검정교과서의 역사왜곡 문제에서 나타난 일본 정치가들의 무사상성에 놀라게 되고 전세계는커녕 동아시아 속의 역할마저 깨닫지 못하는 일본의 왜소한 심성에 실망을 금할 수 없다.

일본의 우익 국수주의는 지난 100년간의 역사를 미화해서 ‘국사’로 다시 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 것 같다. 19세기에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했던 근대 일본은 자기 문화권 내의 이웃을 능멸한 과거가 있다. 그 때문에 현대사 서술은 일본열도 내에 국한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지난 세기 100여년간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일으킨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거의 모두 국외에서의 침략과 전쟁으로 얼룩졌다.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연히 있는 동아시아의 분란기였고 일본의 ‘병든 민족주의’가 저지른 죄악의 역사였다.

21세기의 밝은 비전을 모색해야 할 오늘의 일본정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과거 침략사에 대한 자기반성은 일시적 ‘다테마에’(建前)의 눈가림이었고 이제 ‘혼네’(본심)를 내놓는 것이 군국주의적 일본에의 복고라면 일본정계에 과연 ‘사상성’을 갖춘 정치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의 단골 발언으로 인기를 탐닉하는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나 어려울 때마다 ‘가미카제(神風)’를 상기했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발언에서 ‘가미카제’ 사관의 망령까지 백주에 튀어나온 느낌이 든다. 13세기 몽고침략 때 ‘신풍’이 불었다는 미신에 뿌리박은 ‘가미카제’ 사관의 재등장이 일부 일본인의 국수주의 정서에 영합한 것이라면 깊게 마음의 병이 든 것이다.

‘가미카제’ 사관은 19세기 한국침략의 명분으로 내걸었던 ‘정한론(征韓論)’의 망령마저 연상시킨다. 그러나 전후 ‘가미카제’ 사관을 비판한 양심 있는 지성 하타다(旗田) 교수는 그의 ‘조선사’에서 삼별초 등 고려의 항몽투쟁이 몽고의 일본침략을 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기술했다. 하타다 교수는 한일 양민족간의 국제적 연대성의 새로운 역사관을 일구어냈다.

세기말부터 새로 대두한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주도권을 둘러싼 4강 각축 조짐 앞에서 열려진 비전 없는 일본의 헤게모니는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한때 경제대국의 꿈에 부풀었던 일본경제의 거품이 주저앉자 이번에는 정치가 국수주의 일본사관의 복고적 ‘거품’을 쌓아올리고 있다.

또다시 동아시아 탈퇴를 몽상하는 ‘제2의 탈아(脫亞)’로의 퇴보마저 느껴지고 아시아적 평화와 연대의식은 보이지 않는다. 정신사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의 일본은 1930년대로 뒷걸음쳐 ‘제2의 국제연맹 탈퇴’와 같은 자폐증 쇄국의 길에 들어선 듯싶다.

80년대 미국의 ‘일본 때리기’ 여론, 북한 대포동 미사일의 일본열도 상공 횡단, 역사교과서 왜곡 논쟁 등 일본정치가 국수주의 복고로 퇴행할 수 있는 함정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50여년의 일본 현대사에서 일말의 희망을 보고 특히 고베(神戶) 지진 때 보여준 일본 시민정신의 성숙에 주목한다.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일본 지식인과 시민단체에서 깨어난 일본을 엿볼 수 있다.

▼시민정신으로 역사 바로잡길▼

국수주의 사관의 선동을 극복해낼 수 있는 일본의 깨어난 시민의식에 거는 이웃나라의 기대는 크다. 역사왜곡의 교과서가 성숙된 일본 국민의 시민불복종 앞에 무릎을 꿇는 쾌거를 보고 싶다. 패전 때까지 일본에 만연했던 파시즘이 만든 ‘악의 진부성’을 탈피하는 시민정신의 승리를 학수고대한다.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는 동아시아 제국과의 외교문제이기에 앞서 일본 국민 자신의 정신적 성숙에 대한 평가가 걸린 문제요, 세계사적 심판 앞에 선 일본의 정체성이 가름되는 문제임을 진심으로 충언해 주고 싶다.

신일철(고려대 명예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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