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는 모임 교과서를 합격시킨 데 대해 “특정 교과서의 내용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견해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고이즈미 총리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근린제국이 반드시 이해해 줄 것으로 믿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 속에는 “별일도 아닌데 한국이나 중국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일본의 불만이 깔려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정치가들이 해온 ‘망언’들을 살펴보면 이 같은 일본의 역사인식이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며 그 뿌리가 깊고 넓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차대전을 일으킨 가해자 일본은 피해자인 한국이나 중국의 비난을 한낱 ‘약자의 화풀이’ 정도로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관련된 일본의 역사왜곡은 △정당방위론 △한국책임론 △시혜론 △증거불충분론 등으로 나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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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上-국내외 반발 아랑곳 없는 야스쿠니 참배 |
정당방위론은 한국이 다른 열강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일본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식민통치를 하게 됐다는 주장이다. 모임 교과서가 “한반도는 일본을 향해 뻗은 팔뚝”이라고 기술한 것도 이 같은 논리에 근거한다. 미국 영국 중국 등이 일본을 압박하니까 살기 위해 아시아로 ‘진출’했다는 논리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책임론은 한국이 무능력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는 것이며, 시혜론은 식민지배 당시 일본이 한국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다는 주장이다. 모임 교과서는 시혜론에 근거해 “한국합병을 한 뒤 일본은 철도 및 관개시설을 정비하는 등 개발에 나섰으며, 토지조사를 시작했다”고 기술했다. 시혜론을 아시아로 확대하면 “태평양전쟁은 아시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이 된다.
증거불충분론의 대표적인 주장은 “군대 위안부는 없었다”는 것이다. 어디에도 일본 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 ‘공창(公娼)’이거나 ‘상업행위’라고 주장한다.
일본 내 역사인식의 현주소는 ‘자학(自虐)사관’과 ‘자유사관’ 논쟁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모임측은 기존 교과서가 지나칠 정도로 일본의 죄의식을 강조하고 있다며 이를 ‘자학사관’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리고 일본의 긍지를 일깨우는 자신들의 사관을 ‘자유사관’이라고 명명했다. 자학사관과 자유사관을 가르는 최초의 키워드가 바로 군대 위안부였다. 그래서 모임측은 위안부에 관해서는 한 줄도 기술하지 않았다고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에는 가해자로서의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고이즈미 총리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관련해 가해자로서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나라를 위해 숨진 영령들을 참배하는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줄곧 일본인의 감정에 호소해 왔다.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 직전 담화를 통해 마지못해 아시아 국가들에게 안겨준 피해와 고통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했을 뿐이다.
일본 내에서도 이런 역사인식에 대한 반대론이 있기는 하다. 모임교과서가 거의 채택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역사인식에 대해 ‘레드 카드’를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임 교과서가 출판돼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과정을 통해 확인되었듯이 ‘일본의 긍지를 함양한다’는 구실로 역사에 덧칠을 하려는 일본인들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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