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매일 900명이 ‘월북’한다.
금강산 관광객이다.
‘내가 북한에 내는 관광비가 혹시 미사일 쏘는 데 쓰이지는 않을까….’
그래서 북한 땅을 밟기가 마뜩지 않다면 올여름엔 강원 고성의 건봉사를 찾자.
금강산 초입으로 휴전선을 넘지 않고도 금강산을 밟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다. 국도 46호선. 그 동쪽 끝은 강원 고성(간성읍)이다.
인제와 고성을 잇는 대간의 고갯길 세 개,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그중 유일하게 터널이 뚫리지 않은 진부령의 구절양장 굽잇길이
바로 이 길이다.
그 고개 너머 도로의 끄트머리쯤 건봉사(고성군 거진읍 냉천리)로 이어지는 샛길이 나있다.》
숲에 둘러싸인 호젓한 이 길. 건봉사에 이르러 끝이 난다. 절 앞 주차장. 차문을 여니 정신이 번쩍 든다. 또랑또랑한 계곡 물소리, 솜털 설 만큼 서늘한 기온, 숨통 트일 만큼 청징한 공기 덕분이다.
절터는 계곡물 좌우로 나뉘고 길은 계곡 왼편을 따른다. 그 길의 초입, 돌기둥 네 개로 떠받친 큰 문이 있다. ‘불이문(不二門).’ 부처를 향한 마음이 둘일 수 없다는 단호한 주문이다.
자박자박 계곡 물소리에 장단 맞춰 오르는 산길. 계곡 위로 무지개가 섰다. 일곱 빛깔 무지개가 아니다. 무지개 모양의 돌다리, ‘능파(凌波)교’다. 다리는 계곡 왼편(남쪽)의 극락전, 팔상전(6·25전쟁 때 소실)터와 오른편(북쪽)의 대웅전, 염불전을 잇는다. 능파란 사바세계의 고통을 불법(佛法·부처님 말씀)으로 헤침을 이른다.
그 다리 건너 만나는 돌기둥 두 개. 표면에 다섯 개씩 상징이 새겨져 있다. ‘십바라밀’이다. 이승의 번뇌에서 해탈,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열 가지 수행법이다. 대웅전은 그 석주 앞 누대(봉서루)의 통로를 지나 닿는 절 마당의 정면(북쪽)에 있다.
건봉사는 대찰이었다. 1930년대만 해도 국내 4대 사찰에 들었을 정도. 지금은 설악산 신흥사의 말사지만 당시는 거꾸로 신흥사와 낙산사를 거느린 본사였다. 그 건봉사를 규모로만 말해서는 안 된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의병을 일으킨 호국불교의 터전, 이 세상 단 두 곳(스리랑카, 한국)에만 봉안된 부처님 진신치아 사리를 모신 사찰, 28년간 쉬지 않는 염불수행 ‘만일염불’의 도량으로 더더욱 이름났기 때문이다.
경내에 치아사리가 봉안된 곳은 두 곳. 대웅전 옆 ‘만일염불원’과 계곡 건너 적멸보궁이다. 염불원에서는 투명한 ‘석가세존 치아사리함’(5과)을 통해 친견한다. 적멸보궁에서는 사리탑에 봉안(3과)됐다. 치아사리는 사연도 많다. 임란 때는 왜군에게 침탈당해 사명대사가 되찾아 왔다. 1986년에는 도둑을 맞아 총 12과 가운데 4과를 잃었다.
당시 도난당한 치아사리를 되찾은 경위도 귀를 솔깃하게 한다. 범인이 자발적으로 되돌려 주었는데 이유는 꿈. 웬 할아버지가 현몽해 돌려주지 않으면 후손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단다.
건봉사 계곡은 금강산 길목이다. 민통선이 절 뒤로 물러선 1989년까지 35년간은 불자의 범접조차 어려웠다. 그 민통선이 절 뒤로 지날 만큼 비무장지대에 가깝다. 남방한계선 철책도 예서 4km 북쪽이다. 산양의 서식지인 고진동 계곡(비무장지대)도 멀지 않다.
이런 건봉사의 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1km 거리의 ‘등공대’를 다녀오는 것. 이 전망 좋은 봉우리는 만일염불의 효시인 발징 스님의 다비식(758년)을 올린 곳. 민통선 철책 문을 통과한 뒤 최전방부대 보급로를 가로질러 지뢰 경고판이 설치된 철조망 친 오솔길로 간다. 숲길에는 들꽃과 산딸기도 많다.
건봉사의 멋스러움은 스러진 절터에 있다. 낙서암이 있던 터. 무너진 돌기둥을 들꽃이 덮고 있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오솔길. 연꽃 피는 두개의 연못 사이를 지나 팔상전 옛터를 밟는다. 1500년 역사를 간직한 고찰의 옛터는 수채화처럼 수더분하고 고즈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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