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캐나다의 북미대륙이야말로 자동차 여행이 제격. 미국을 경유하는 항공루트로 캐나다에 입국해 동쪽 끝 노바스코샤 주의 주도인 핼리팩스와 윈저로 떠나는 자동차 여행길로 안내한다.
노바스코샤 주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방(메사추세츠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버몬트 메인 뉴햄프셔 등 동북부 6개 주)과 이웃한 캐나다의 동쪽 땅 끝. 핼리팩스는 반도 지형인 노바스코샤 주 동단의 주도(州都)다. 노바스코샤란 ‘뉴스코틀랜드’라는 뜻이다.
핼리팩스는 18세기 신대륙 개척기에 군사 우위를 점하려는 영국이 개척한 군사기지. 퀘벡과 윈저(노바스코샤 주)로 먼저 진출한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이곳은 프랑스 배가 드나드는 해상을 감시하기에 그만인 천혜의 요새이자 천연의 항구다.
공항에서 시내까지는 35km. 옛 요새가 있는 사타들힐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언덕마루의 요새에 오르니 항구와 도시가 한눈에 들어왔다. 당시 대포도 그대로 놓여 있다. 핼리팩스 항구 앞으로 펼쳐진 거친 대서양. 타이타닉 호는 예서 머잖은 그 바다에서 침몰했다. 그 잔해가 떠내려 와 발견된 곳도 여기다.
차를 몰아 서북쪽 펀디 만(灣)을 향해 달렸다. 미나스베이슨 지역의 작은 타운 윈저를 찾아서다. 미나스베이슨은 지반 침하로 생긴 거대한 물골. 윈저는 18세기 개척기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타운이자 캐나다의 상징인 아이스하키가 탄생한 곳. 18세기 말∼19세기 초 한때는 대서양 무역선이 짐을 부리던 캐나다 제3의 항구이자 조선소가 밀집한 해양 비즈니스 타운이었다. 지금은 주민 4000명의 아담한 타운이지만.
신대륙 캐나다에 최초로 정착을 시도한 프랑스. 첫 시도(1605년)는 영국인 143명이 건설한 미국 최초의 정착촌 제임스타운(버지니아 주)보다도 한 해 앞선다.
그러나 두 차례 시도는 모두 실패. 첫 정착촌은 27년 후(1632년)에야 설립됐다. 그것이 ‘아카디아’(캐나다의 프랑스 정착촌 혹은 정착민)고 그 현장이 윈저 근방의 미나스베이슨 지역이다.
신대륙 개척기의 역사는 영국과 프랑스의 땅 싸움으로 점철됐다. 미나스베이슨도 예외는 아니었다. 1715년 뒤늦게 윈저에 진주한 영국군은 40년 후 이 일대 1066명의 아카디안을 강제로 내쫓는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한다. 윈저의 ‘포트 에드워드’는 당시 영국군 진지다.
핼리팩스에서 윈저까지는 65km. 시속 100∼110km로 달리는 하이웨이가 놓여 있어 40분이면 갈 수 있다. 도중에 펼쳐지는 노바스코샤의 자연. 왜 ‘뉴스코틀랜드’로 불리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언덕과 구릉 지형이 스코틀랜드를 빼닮았다.
이곳은 지구상에서 간만의 차가 크기로 이름난 곳. 그 차가 최고 18m에 이른다. 그래서 썰물 때면 거대한 개펄이 드러나는데 그 개펄이 아카디안을 낳았다. 댐만 쌓으면 힘들이지 않고 농토를 확보(간척사업)할 수 있기 때문. 실제로 프랑스 정착민은 300만 평의 간석지를 옥토로 일궜고, 결국은 그 때문에 내쫓김을 당했다.
그 개척 현장은 지금도 남아 있다. 30km쯤 떨어진 그랑프레의 다이크랜드(간석지)가 그곳. 서산의 천수만처럼 펼쳐진 광대한 농토 앞에 이곳이 간석지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어 있다. 마을 홈페이지가 프랑스어로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랑프레에서 341번 도로를 따라 블로미돈 곶을 향해 달렸다. 미나스베이슨의 육지에 갇힌 바다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도중에 펼쳐진 자연은 스코틀랜드 그 자체라고 할 만큼 닮았다. 절벽 해안의 초원과 농가가 바다와 어우러진 풍경. 런던을 출발한 에든버러(스코틀랜드)행 기차에서 보았던 풍경, 바로 그것이었다.
신호등도 없는 한적한 시골 길을 마냥 넋 놓고 달릴 수 있는 노바스코샤 해안의 자동차여행. 순박한 캐나다 사람과 바다를 배경으로 낭만과 여유가 느껴지는 아늑한 농촌풍경 덕분에 그 여행길은 피로도 잊을 만큼 즐거웠다.
서부와는 전혀 다른 풍광의 노바스코샤. 친절한 캐나다 사람, 그리고 캐나다판 스코틀랜드 풍광을 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하고픈 아름다운 곳이다.
노바스코샤=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1800년 신대륙 무역항 윈저의 작은 얼음판서 아이스하키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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