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개의 큰 섬으로 이뤄진 일본 열도. 규슈는 그 남단의 막내 섬이다. 아직도 활화산이 연기와 재를 내뿜는 곳. 아소 산(구마모토 현)은 어머니 지구가 일본에 준 특별한 선물이다. 연기와 유황가스를 내뿜는 분화구 아래서 솟구치는 온천수를 말함이다. 이름하여 아소 산의 삼색온천 구로카와(黑川)로 여행을 떠난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雪國)이 펼쳐졌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 첫 대목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길기도 긴 터널의 어둠 속을 빠져나오자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 아래 펼쳐진 꽃대궐이 설국 아닌 춘국(春國)으로 다가온 탓입니다.
구마모토의 봄은 참으로 화려했습니다. 울긋불긋 꽃대궐에만 봄이 핀 것은 아니었습니다.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는 여인의 고운 다리에도, 검붉은 화산토 들판에 뿌리내린 차나무 가지에서 삐쭉삐쭉 내민 연초록 이파리에도, 아소 산의 청초한 초원에서 긴 하품을 일삼는 검정소의 입가에도 봄은 활짝 피었습니다.
화산과 온천을 두루 갖춘 구마모토. 미쓰오 마쓰오카(구마모토 현 상공관광부 참사) 씨는 저를 현의 북쪽 끝자락에 자리 잡은 구로카와 온천으로 데려갔습니다. 순위 매김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인지라 구로카와 온천도 그런 식으로 소개됐습니다. 일본 5대 온천마을 중의 하나라고. 그곳은 아소 산 자락의 산비탈로 24개의 온천 료칸(여관)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유서 깊은 온천마을에는 온천 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온천을 ‘탕치(온천탕 치료의 준말)’ 수단으로 활용해 온 일본에서는 탕마다 다른 치료효과를 찾아냈고, 그래서 여러 온천탕을 두루 이용할 수 있도록 이런 형식으로 순례를 시킵니다. 최근에는 손님이 적게 드는 고답적인 공중온천탕의 수지를 개선하기 위한 마케팅 기법으로 애용되기도 하지요.
“여기 온천수는 용출수온이 80도에서 100도나 됩니다. 그래서 노텐부로(노천탕)가 좋습니다. 또 탕마다 유황 산화철 등 함유 성분이 다르고 물빛도 다양합니다.” 가이드의 설명입니다.
각 료칸의 노텐부로는 계곡 물가에 길게 뻗어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기자기합니다. 나무로 이은 지붕 아래 자그마한 탕이 들어선 모습이 ‘일본답다’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계곡의 산비탈에 자리 잡은 전통 료칸 신메이칸입니다. 고즈넉한 이 료칸을 배경으로 유카타(여름용의 얇고 간편한 기모노) 차림의 일본인 관광객이 보입니다. 분재를 확대한 듯 꾸민 정원이 아름답습니다.
두 번째로 찾은 곳. 그곳은 ‘미인탕’이라는 특별한 노텐부로로 이름난 이코이라는 료칸입니다. 호기심에 이끌려 서둘러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삼나무 조각을 태우는 화롯가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관광객이 정겹게 다가왔습니다. 차를 파는 다실입니다.
미인탕은 ‘나무꾼과 선녀’라는 일본의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아늑한 노텐부로입니다. 너럭바위의 아래와 위에 2개의 탕을 두었는데 주위는 대나무가 숲을 이룹니다. 그리고 온천수는 3m 정도 높이에서 떨어집니다. 그 소리에 귀가 즐겁고, 탕 주변에 피어올라 주변을 감싸는 뿌연 온천증기에 눈이 즐겁습니다. 마치 천국에 온 듯합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탕 속의 미녀’는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노랑 머리칼의 서양 청년이 탕 안에 홀로 있었을 뿐.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여기서도 진리입니다. 이번에는 노텐부로를 직접 체험하기로 했습니다. 그곳은 우야마비코 료칸입니다. 일본 전통식 목조건물에 아기자기한 실내장식이 꼭 인형나라를 닮은 곳입니다. 노텐부로에는 20평 정도의 연못 같은 대욕탕과 우물 같은 소욕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은 대나무와 삼나무, 그리고 열대 꽃나무들로 담을 쳤습니다. 탕 안의 수면 위로 낙엽 몇 잎과 꽃잎이 동동동 떠다닙니다. 그리고 돌돌돌 떨어지는 온천수에서 진한 유황냄새가 풍깁니다. 거기에 몸을 담급니다.
“어으, 시원하다. 온천물 닿으니 피부가 매끈매끈한 게 꼭 집사람 처녀 때 볼살 같네.”
“경치 좀 봐. 아래로는 파르스름한 물빛, 위로는 사각사각 댓잎 떨리는 소리, 거기에 이 상큼한 산공기 맛까지. 오감만족이 따로 없구먼.”
“단풍 들면 죽여주겠네. 눈 오면 어떻고. 어휴, 천국이 따로 없겠다.”
이내 이마에 땀방울이 몽실몽실 맺힙니다. 하늘에선 빗방울이 후두둑 흩날립니다. 노텐부로에서의 빗발 마중은 또 어떨지. 그래서 바닥에 누워 그 비를 맞습니다. 뜨거워진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정없습니다. 그 기분이 어찌나 좋은지. 그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습니다.
구마모토=연제호 기자 sol@donga.com
■진흙 온천수에 유황성분… 신경통 환자들 북적
○ 헉, 남녀가 같은 탕에서 목욕을?
200여 년 역사의 이곳은 승려나 사무라이만 이용하던 온천. 활화산의 지열로 데워진 온천수에는 유황 성분이 많은데 신경통 류머티즘 부인병 등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났다. 그래서 관광객보다는 탕치 목적의 만성환자(70%)가 주류.
혼욕탕인 스즈메노는 노텐부로다. 5개의 탕은 모두 남녀공용이다. 그런데 탕 바닥에서 진흙이 온천수와 함께 솟는다. 화산머드욕과 유황온천욕을 동시에 즐기는 셈. 일본 전국에서도 진흙온천수가 솟는 곳은 군마 현과 아오모리 현 등 세 현뿐이라는 게 주민들의 설명이다. 탕 안에 누워서 감상하는 아소 산의 산경은 스즈메노가 주는 보너스다.
○ 노텐부로의 종합선물세트인 아소팜랜드
아소팜랜드는 아소 산의 해발 350m 산자락에 자리 잡은 대규모(100만 평) 온천테마파크. ‘사람 자연 건강’을 주제로 산비탈에 들어선 이 리조트 타운은 놀이기구 위주의 여느 테마파크와 다르다. 아소 산의 자연과 환경을 바탕으로 휴식과 산책을 테마로 설계됐다.
그 시설은 모두 8가지. 아소 산 초원에서 생산되는 우유로 만든 유제품 판매장 밀크팜, 게이트볼을 즐기는 건강의 숲, 아소 산 일대의 농산물 직판장인 고원시장, 염소 등 동물을 전시하는 후레아이 동물왕국, 도자기 체험공방인 공예마을, 토산품 맥주를 즐길 수 있는 비어가든, 숙소인 아소팜 빌리지, 그리고 노텐부로 파크라 할 만한 화산온천이 그것.
20만 평 규모의 숙소 아소팜 빌리지,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노텐부로와 스파시설을 갖춘 화산온천의 야외욕장은 리조트 시설 가운데 백미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스머프의 집을 닮은 아소팜 빌리지 돔하우스(420동)는 손님들을 동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동그랗고 높은 실내의 돔형 천장 한가운데는 유리창이 있어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잠들 수 있다. 숙소는 2인실부터 6인실까지 다양하다.
화산온천의 온천수는 지하 900m에서 용출된다. 이 물은 온천 천국 일본에서도 수질이 좋기로 이름났다. 노텐부로에 몸을 담근 채 상큼한 아소 산의 신선한 공기를 호흡하며 땀 흘리는 화산온천에서의 온천욕. 그 편안함에 젖다 보면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구마모토=연제호 기자 sol@donga.com
●여행정보
◇료칸박사=㈜여행박사(www.tourbaksa.com)가 최근 문을 연 일본 전통 료칸 예약 및 안내사이트(www.tourbaksa.com/ryokan). 일본 전국 온천의 료칸 여행 상품 안내 및 예약은 물론 일본 온천과 온천욕에 관한 상세한 정보(입욕 예절, 유카타 착용법, 온천 이용 및 가이세키 요리 안내 등)가 있다. ▽료칸박사 패키지(가이드+전용차량) △구로카와(료칸 숙박): 2박 3일은 52만9000원부터, 3박 4일은 119만 원부터. △아소팜랜드: 부관페리(부산∼시모노세키) 이용, 2박 3일이 26만 원부터. 02-730-6166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