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박현민(26·성균관대 프랑스어문학과) 씨가 비판받는 이유는 단 하나.
2년째 일본만 간다는 사실 때문이다. 벌써 7번이나 도쿄를 방문했다. 그는 이번 설 연휴 기간에도 망설임 없이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손에 쥐었다. 이번에는 도쿄의 ‘용산’이라 불리는 전자상가 밀집지역인 아키하바라에서 게임기 ‘플레이스테이션3’의 60GB(기가바이트) 모델을 구입하는 게 목적이다.
자칭 ‘게임마니아’인 박 씨가 2년간 일본에 가서 직접 산 게임기는 모두 3대, 게임소프트는 50개가 넘는다. 아키하바라를 비롯해 시부야, 신주쿠 등 대도시를 돌며 여행 겸 쇼핑을 즐기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군 입대 전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닌텐도DS’ 등 게임기와 게임소프트를 구입했지만 일본 현지에서만 나오는 한정판은 좀처럼 구할 수 없었다. 군 제대 후“직접 현지에 가보자”고 마음먹은 박 씨는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카페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비롯해 대기업 인턴사원, 영상 제작, 심지어 카지노 보조 일까지 하면서 한 달에 적게는 50만 원에서 많게는 200만 원까지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을 그는 과감하게 일본 여행과 게임기 구입을 위해 아낌없이 쓴다. 그는 “현지에서 직접 만지며 구입하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연스레 도쿄 여행도 수준급이 됐다.
게임기와 게임소프트 상점을 따라 이동하다 보니 주변의 음식점이나 백화점, 클럽 등 명소도 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 경비를 줄이기 위해 500엔 이하의 단골 덮밥집, 숙박비를 줄이기 위해 밤새워 놀 수 있는 클럽, 심야 정액제 PC방 등 절약 노하우도 몸에 익혔다. 그는 “내가 원하는 곳에 당당히 투자하며 즐기는 모습에 이제는 부모님도 흐뭇해하신다”고 말했다.
무작정 여행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무작정 쇼핑을 하러 해외에 나가는 시대도 옛날 얘기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위해서라면 지구 끝까지라도 날아갈 준비가 돼 있는 그들, 이른바 ‘쇼플러(쇼핑+트래블러)’들은 오늘도 세계지도를 펼치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미쳤다고? 길게 뻗은 설날 연휴, 출국하기 위해 분주히 짐을 싸고 있는 이들이 한결같이 외친다. “너도 한번 미쳐봐!”
○ ‘꽂히면’ 바로 행동 개시… 쇼플러가 사는 법
아시아는 물론이고 목각 인형과 꼭두각시 인형으로 유명한 체코 프라하, 스페인 마드리드 왕궁 앞, 아프리카 인형이 많은 케냐 나이로비의 마사이마켓까지 ‘단순히’ 인형을 모으기 위해 5대양 6대주를 넘나든다. 채 씨는 “주로 장터에 인형시장이 형성되다 보니 자연스레 그 나라의 토속적인 시장 근처를 중심으로 여행한다”고 말했다. 인형 박물관을 만드는 게 목표라는 채 씨는 올해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 가서 ‘바오밥’ 나무 인형을 살 예정이다.
나, 청바지 마니아… 8년째 태국행 비행기 탄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로 출국한 사람은 총 1336만2129명(추정치)으로 2006년 1160만9878명에 비해 15% 늘었다. 그중 이들이 해외에서 지출한 소비액 역시 2006년 97조 원에서 107조 원(한국은행 자료, 2007년 11월 기준)으로 늘었다. 더는 ‘쇼핑’을 빼놓고는 해외여행을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는 이른바 ‘쇼플러’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중국 홍콩, 상하이 등 단순히 쇼핑 명소를 방문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국내에서 구할 수 없는 물건을 구하기 위해 직접 떠나는 수집광이라는 게 특징이다. 품목은 음반부터 책, 장난감, 낚시용품 등 다양하다. 심지어 국내에서 구할 수 있어도 직접 현장을 가야 쾌감을 얻는다는 쇼플러들도 있다. 이들은 물건을 파는 상점 위주로 여행 코스를 잡거나 쇼핑 후 남는 시간에 여행을 하는 등 여행은 ‘덤’으로 여기고 있다.
상품 구매가 주목적인 만큼 이들의 목적지는 일본, 태국, 대만 등 대부분 아시아다. 그러나 최근에는 채지형 씨처럼 미국, 유럽 등 항공료에 상관없이 먼 지역으로 가는 쇼플러들도 생겨나고 있다. 반도체회사 직원 김장훈(30) 씨는 3년째 독일 베를린 앞 ‘베를린 장벽’ 내 5일장에 가서 비행기, 탱크 등 ‘밀리터리 피겨(military figure)’를 직접 구입하고 있다. 그는 “항공료, 숙박비 등 300만 원 정도가 들지만 흥정하며 직접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고 말했다. 3월경 다시 베를린 시장에 갈 예정인 김 씨는 “여행 경비를 모으기 위해 최근 펀드 하나를 가입했고 재테크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를 위한 투자… 쇼핑의 중심은 나
이런 쇼플러 문화는 해외여행의 대중화와 ‘마니아’ 문화가 맞물리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이 펼치는 쇼핑의 주체와 객체는 모두 자신이다. 과거 지인들을 위해 면세점에서 사는 ‘기념품’과는 전혀 다른, 오로지 자신의 만족을 위한 행위일 뿐이다.
특히 수집가적인 면모를 띠는 이들은 여러 곳을 돌아다니기보다 주로 나라 한 곳, 특정 장소에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8년 동안 태국 방콕에 가서 ‘구제’ 청바지만 사고 있는 직장인 장혜민(30·여) 씨는 “방콕에 자주 가다 보니 느린 듯 여유로운 태국의 문화에 흥미가 생겼다”고 말했다. 짜뚜짝시장, 시암스퀘어 등지를 8년간 방문하며 주변의 태국 음식점,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태국 음악 등에 익숙해진 것이다. 설 연휴 기간을 합쳐 14일간 방콕에 갈 예정인 장 씨는 어느덧 “태국산 구제 청바지를 입고 태국 시내를 걷는 게 더 편하다”라고 말할 정도로 태국 문화가 몸에 뱄다.
소비 습관이 바뀐 경우도 있다. 은 액세서리를 사러 태국 방콕에 간다는 직장인 김진선(24·여) 씨는 “돈을 모은 후 현지에 가서 한 번에 사오다 보니 어느샌가 돈을 최대한 아끼는 버릇과 한 번에 ‘지르는’ 버릇 두 개가 동시에 생겼다”고 말했다.
이러한 쇼플러 문화가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강대 사회학과 전상진 교수는 “쇼플러들은 해외까지 가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길 원한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이런 의식적인 행위는 스스로에게 진정성을 부여하고 욕망을 극대화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의식적인 행위를 넘어서 자신에 대한 ‘투자’라는 의견도 있다. 3년 전부터 해외 문화 트렌드, 인테리어 관련 서적을 사러 미국 뉴욕까지 간다는 스타일리스트 서은영 씨는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고 문화적 충격을 맛보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값비싼 투자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해외 구매 대행 사이트를 손쉽게 접할 수 있지만 쇼플러들은 이에 개의치 않는 반응이다. 온라인 문화가 주지 못하는 오프라인만의 ‘직접 체험’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행전문가 최미선 씨는 “쇼플러 문화는 쇼핑과 여행을 한 번에 해결하는 형태”라며 “이를 통해 계획적이고 알뜰한 여행 문화가 정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마니아’ 문화에 뿌리를 둔 만큼 전체적인 공감대를 형성할지는 의문이다. 전 교수는 “남들과 다르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 문화이기에 쇼플러 문화가 유행처럼 사회 전반에 퍼진다면 오히려 빨리 소멸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 영상 취재 : 박영대 기자
▲ 영상 취재 : 박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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