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박기영의 산티아고 여행기] 33일간 ‘아름다운 고행’ 내 속의 또다른 나를 찾다

  • 입력 2008년 7월 3일 09시 24분


시간과 업무의 노예가 되어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던 어느 날. 무심코 창문 밖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여전히 파랗군.

다시 하던 일에 열중하려던 찰나 번개같이 스친 생각 하나. 유럽의 하늘도 파랄까? 아프리카는? 동남아는? 인도는? 일본은? 궁금해진다.

뭔지 모를 호기심에 엉덩이가 들썩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봐! 이쯤하면 여행한 번 다녀와야 하지 않겠어?

여행은 그렇다.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5cm쯤은 올라가게 만든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대대적인 슬로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아쉬운 대로 가까운 바닷바람만 살짝 콧구멍에 넣고 와야 한다 하더라도. 쳇바퀴 돌듯 유지되던 평범한 일상이라는 잔잔한 호수에 주먹만한 돌덩이 하나 정도 던지는 파장은 되지 않을까? 누가 알까? 그 잔잔한 파장이 나비효과로 건너편 호수에 큰 파도를 일으킬 줄도 모를 일이다.

그 건너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일상’이라는 삶 속에서 말이다.

고등학교 때였다. 친한 친구가 여행 가이드북을 가져왔다.

“기영아, 이 책에 나와 있는 나라들, 한번 가보고 싶지 않니? 나는 말이야. 대학에 들어가면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방학 때마다 여행을 떠날 거야. 여행을 통해서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자유를 맘껏 누릴 거야. 그렇게 난 자유인이 될 거야.”

당시 음악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나에게 친구는 여행에 관한 호기심을 자극해 주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대학에 들어갔다. 그 친구는 여고시절의 다짐대로 방학 때마다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러더니 아예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여행지 중에서 가장 살고 싶었던 곳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의 남자를 만나서 정착해버렸다.

몇 년 전 캐나다에 살고 있다는 그녀가 보내준 가족사진에는 친구만큼이나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듯한 남편과 함께 동서양의 아름다움을 오묘하게 섞어놓은 아들이 함박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 인사하고 있었다.

그녀의 편지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사랑하는 기영. 널 자주 볼 수는 없지만 이 먼 곳에서도 너를 응원하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나는 나의 꿈을 위해 살고 있어. 힘들 때도 있지만 정말 행복해. 너는 어떠니?”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 자꾸만 나를 자극한다. 나는 어떨까? 나는. 어떤 걸까? 여기 나를 자극시키는 사람이 한명 더 있다. ‘연금술사’의 저자로 유명한 브라질 출신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

세 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청소년기를 지나 록밴드를 결성하고 히피문화에 심취하며 만화잡지를 창간했던 그는 잡지의 성향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브라질 군사정권에 의해 두 차례 수감되고 고문당했던 청년기를 거치게 된다. 그 후 세계적인 음반 회사의 중역으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던 그의 나이 서른아홉에 돌연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긴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 이후의 작품 활동을 통해 그는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그가 선택한 여행이 총 길이 840km.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하는 순례의 길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2007년 4월 7일.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던 그 길 위에 나도 33일간의 여정에 첫 발을 내디뎠다.

여행 후에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크게는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버리기도 하고 작게는 일상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여행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삶에 주는 영향은 세기를 막론하고 분명 신선한 것이리라.

소금에 절인 배추마냥 축 늘어져 ‘현실의 무게’에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쯤 누군가 귓가에 대고‘나 여행가!’라고 한다면 순간적으로 클릭된 ‘여행’이라는 단어가 찬물이 되어 온몸에 확 끼얹어짐과 동시에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초점 잃은 동태눈과 같던 두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게 될 것이다.

그 설렘. 그 동경. 말라버린 잎사귀에 고단백 영양제를 투사하듯 나에게도 허락되기를 누군들 바라지 않겠는가?

휴식이 되도 좋고 모험이 되도 좋다. 무모한 도전이었을망정 실패해도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는다. 그것이 여행이 주는 관대함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긍정적인 면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여행의 기술’에서 J. K. 위스망스(Joris Karl Huysmans, 프랑스의 작가)의 소설‘거꾸로(A Rebours)’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주인공 데제생트 공작을 잠시 등장시켜 여행에 부정적인 이들의 대표적인 성향을 보여준다.

데제생트 공작은 네덜란드에 다녀온 뒤, 영국에 가려다가 한마디로 만사 귀찮고 피곤하다는 생각을 이기지 못해 결국 포기하고 다시는 해외여행을 시도하지 않는다. 대신 그의 별장을 여행의 가장 훌륭한 측면인 여행에 대한 기대, 즉 불편은 전혀 겪지 않고 여행의 가장 유쾌한 측면들만을 상상하게 만드는 물건들로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세계를 다 돌아본 것과 다름없다며 이렇게 결론짓는다.

“상상력은 실제 경험이라는 천박한 현실보다 훨씬 나은 대체물을 제공할 수 있다.”

이런 비슷한 뉘앙스의 얘기는 늘 있어왔다. “산을 꼭 넘어야지 산에 대해서 아는 건 아니잖아. 책은 왜있니? 이렇듯 책에 다 나와 있는데 굳이 고생하며 이것저것 다 겪을 게 뭐야?”

대부분 자신의 지적능력을 과신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조금 덜 똑똑한 관계로 책을 보고 호기심이 생기면 경험하기 위해 일단 일을 벌인다. 그리고 장담하건데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지라는 낯선 환경에서의 스스로와의 첫 대화는 바로 이것이다.‘어서 빨리 나를 안정시키고 쉬게 하라!’

이렇듯 여행의 설렘도 잠시.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심리적, 신체적 요구에 무너지지 않고 여행이 주는 미학적 거리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행을 함에 있어 우리는 과연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하늘은 파란지 별은 떠있는 건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언어는 있으나 소통되지 않았던 시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외롭다고 말하는 이유는 각자가 외딴섬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자. 다들 미뤄두었던 생각주머니를 차고 누군가와, 혹은 혼자서라도 떠나야 할 때가 왔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면. 과감히 떠나라!

박 기 영

정규앨범 6장과 싱글앨범 1장을 발매한 싱어송라이터, 최근 33일간의 도보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박기영 씨 산티아고에는 왜 가셨어요?’를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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