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해외언론에서 ‘스테이케이션(staycation)’이란 단어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머물다(stay)’와 ‘휴가(vacation)’란 말이 합쳐진 단어다. 휴가 때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그동안 바쁜 일상 때문에 못했던 의미 있는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여가를 말한다.
고유가 시대에 스테이케이션은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집 안을 꾸미거나 식물을 키워볼 수도 있지만 사진을 찍으며 휴가를 보내는 건 어떨까. 현대판 초상화인 사진은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값진 순간들을 그 어떤 여행보다 풍부하게 안겨줄 수도 있다.
바쁜 업무 때문에 가족과 많은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가족사진을 찍어 볼 수 있다. 정형화된 사진의 틀을 깨는 신 개념의 가족사진이 요즘 많이 생겨나고 있다. 도심의 예쁜 카페나 공원에서 디지털카메라로 스스로를 찍는 셀카(셀프 카메라)로 사진에세이를 만드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사진(photo)’과 ‘휴가(vacation)’가 접목된 ‘포토케이션(photocation)’인 셈이다.
○가족 함께 사진찍기+휴가 ‘포토케이션(photocation) 떠나요
최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벤처 스튜디오(www.thisisventure.co.kr)’라는 이색 가족사진 스튜디오가 문을 열었다. 영국 프리미엄 가족사진 브랜드 ‘벤처’가 미국, 홍콩에 이어 해외 지점으로는 세 번째 오픈한 곳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정장을 차려입고 모두 정면을 응시한 근엄하고 딱딱한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부모와 자녀가 청바지를 입고 뒤엉켜 노는 모습, 컬러풀한 하나의 목도리를 함께 두른 커플, 곤히 잠든 어린 아들을 안고 있는 아버지의 뒷모습 등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청바지와 호피무늬 하이힐만 찍은 사진은 팝아트 또는 감각적인 광고 비주얼을 보는 듯하다.
3일 사업가 김형수(52) 씨 가족이 이곳에 왔다. 김 씨와 아내, 세 자녀는 김 씨 부부의 결혼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가족사진을 찍기로 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커다란 트렁크 세 개를 끌고 왔다. 아무런 촬영 소품이 없는 벤처 스튜디오는 촬영 전에 가족이 좋아하는 취미, 요리, 스포츠 등을 상담하면서 가족이 촬영에 필요한 소품을 직접 챙겨오도록 한다. 김 씨의 대학생 아들 태희(20) 씨는 축구공, 초등학생 막내딸 서연(8) 양은 바이올린을 가져왔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촬영 내내 스튜디오에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김 씨 가족은 맨발 차림으로 뛰어다니기도 하고 무등놀이도 했다. 사진작가는 연신 셔터를 눌러대기 때문에 ‘하나 둘 셋 찰칵’ 순에선 포착되기 힘든 자연스러운 표정이 나왔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지면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도심 셀카명소도 여름 휴양지로 딱!
낭만 ‘찰칵’ 행복 ‘찰칵’▼
촬영 후 김 씨는 “어린 막내딸과는 스킨십을 하지만 다 큰 아들, 딸과는 몸을 부딪치며 놀 기회가 없었는데 행복하다”고 말했다.
100컷이 넘는 사진을 찍은 김 씨 가족은 조만간 이 곳에서 시사회를 갖고 자신들이 원하는 사진을 골라 액자나 앨범을 주문하게 된다. 이들이 주문하는 제품은 영국 본사에서 제작돼 한 달 후 배송된다.
● 가족사진은 진화한다
‘가이네 사진공간(www.guyne.com)’은 가족사진을 야외에서 찍는 곳이다.
주재성(32) 실장 부부가 운영하는 이곳은 강원 춘천시 남이섬, 경기 파주시 벽초지 수목원과 헤이리마을, 경기 포천시 허브아일랜드, 경기 고양시 원당종마목장 등 서울 근교를 고객 가족과 함께 찾아가 가족사진을 찍는다.
지난해 가을에는 큰딸의 초등학교 입학을 기념하기 위해 남이섬 여행을 떠나 사진을 찍는 가족도 있었다. 일반 사진관에서 찍는 가족사진은 커다란 액자 형태로 달랑 한 장이지만 이곳에서 찍는 사진은 여러 장 앨범으로도 만들 수 있다.
주 실장은 “자연 빛으로 사진을 찍기 때문에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실루엣이 나온다”며 “따뜻한 분위기를 위해 어머니들은 긴 치마를 입도록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회사원 봉효근(34) 씨 가족은 아내 한수경(30) 씨의 생일을 기념해 6일 녹음이 우거진 벽초지 수목원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두 살배기 딸 하은과 연못에 발 담그고 사진을 찍은 봉 씨는 “우리 가족의 소중한 추억을 사진으로 남겨둘 수 있어 뿌듯하다”고 했다.
사진을 그림으로 바꿔주는 이색 공간도 있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더 포트레이트 컴퍼니(www.theportrait.co.kr)’다.
가족사진, 아기사진, 커플사진 등을 가져오면 주문제작 형태로 아티스트들이 그림으로 그려준다. 탤런트 윤다훈의 결혼발표회 장면도 이곳에서 그림으로 재탄생했다. 스타일리스트 정윤기 씨도 자신의 사진을 가져와 유화로 만들었다. 신혼여행지에서 찍은 커플사진을 그림으로 만든 ‘당신은 나를 완성시킵니다(You complete me)’라는 제목의 유화 작품은 회화적 터치 때문에 따뜻한 느낌이 더욱 강해졌다. 초상화처럼 인물이 직접 화가 앞에 앉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가져와 그림으로 만들기 때문에 선물용으로 인기다.
● 나를 찍는다
“여름휴가 때 준비물은 디지털카메라와 소설책 한 권이죠. 셀카 찍으며 휴가 보내려고 1년을 기다렸어요.”
평소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즐겨 찍는다는 회사원 김준(31) 씨가 휴가 때까지 셀카를 찍는 이유는 뭘까.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다녔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휴가 때 떠나는 여행이 또 다른 일처럼 피곤하게 느껴졌어요. 유유자적한 휴가를 보내고 싶어 지난해 서울에 머물며 호텔, 서점, 커피숍 등을 다니며 셀카를 찍었더니 평소엔 몰랐던 공간들의 매력을 발견하게 됐죠. 무엇보다 복잡한 일상을 떠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피아노학원 강사인 임수정(28) 씨도 셀카를 찍으며 휴가를 보낼 계획을 짰다. 낮에는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카페골목과 신촌 ‘닥터피시’ 카페,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엔 서울 마포구 상암동 하늘공원, 밤에는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애비뉴엘과 압구정동 도산공원 앞 ‘느리게 걷기’ 카페….
요즘 젊은 ‘디지털 스토리텔러 세대’에게 싸이월드 미니홈피와 블로그 꾸미기는 또 하나의 유희다. 그래서 인테리어가 예쁜 카페에선 너도나도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스스로를 찍는다.
이들에게 사진을 찍는 것은 자신의 일상을 온라인을 통해 지인들에게 알리는 소통방식이다. 나아가 심미안을 키우는 예술 행위다. ‘셀카 잘 나오는 곳=여름 휴양지’로 인식되다 보니 젊은 세대가 즐겨 찾는 커피전문점들은 조명을 은은하게 만들거나 벽면에 예술사진을 거는 등 각별하게 신경을 쓴다.
셀카 블로거이자 ‘즐거운 셀카 놀이’의 저자인 강수정(29) 씨는 “셀카는 내가 주인공이기에 특별한 것”이라며 “셀카 마니아들에겐 여름휴가 때 어디를 가느냐보다 어떤 셀카를 찍으며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번 여름휴가 때 나만의 개성을 찾고 싶다면 사진의 세계에 도전해 보면 어떨까. 사진을 찍기 위해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돌아보며 사는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면 그보다 여유로운 행복과 휴식이 있을까. 매 순간이 고이 남겨두고 싶은 소중한 추억이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 주제를 정하고 그에 맞는 소품을 많이 준비한다.
√ 사진작가와 충분히 대화한다.
√ 카메라를 의식하지 말고 재미있게 논다.
√ 촬영 중 서로를 간질이면 자연스럽게 웃는 표정이 나온다.
√ 파란색 모자, 빨간색 티셔츠 같은 원색 의상이 좋다.
√ 아버지가 쓴 육아일기처럼 훗날 자녀에게 뜻 깊을 선물을 가져다준다.
√ 결혼기념일이라면 와인을 촬영소품으로 활용한다.
도움말: 주장일 벤처 스튜디오 포토그래퍼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