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오후 5시 서울 중구 명동.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온 일본 여고생 3명이 재킷이건 바지건 무조건 9900원에 파는 옷가게를 나오며 횡재했다는 표정으로 "스고이 스고이(대단하다, 대단해)!"를 외쳤다. 한아름 옷을 산 이들은 다시 화장품 가게로 향했다.
명동 골목골목은 마치 일본 도쿄(東京)의 중심가를 옮겨놓은 듯 쇼핑백을 든 일본인들로 넘쳤다.
이처럼 명동이 일본인들의 쇼핑 메카로 떠오른 것은 원-엔 환율이 올라(원화가치는 하락) 일본인 관광객들의 구매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1년 전만 해도 한국에서 10만 원짜리 핸드백을 사려면 1만2280엔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6895엔이면 된다.
●명동으로 넘어온 남대문 환전상들
해가 떨어진 오후 7시. 명동 거리는 쇼핑객들로 붐볐다. 곳곳에서 일본말이 들렸다. 이곳 상인들은 행인 가운데 일본인들이 절반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어 안내판을 배치한 점포도 적지 않았다.
쇼핑몰 밀리오레 부근의 환전소 앞에는 일본인 관광객 6, 7명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 관광객은 지갑에 든 엔화를 모두 털어 1만 원짜리 두 다발(200만 원)로 바꿨다. 이곳 환전상은 "손님의 90%가 일본 관광객"이라며 "환전금액도 전에는 많아야 1만 엔(약 14만7000원)이었지만 요즘엔 5만 엔(73만5000원)이 기본"이라고 전했다.
우리은행 명동지점 근처의 간이매점 한쪽 벽에는 '$, £, ¥' 등 각국의 화폐단위를 크게 써 붙인 간판이 있었다. 매점 주인은 "올 여름부터 환전을 시작했는데 음료수 파는 것보다 수익이 좋다"며 "은행 영업시간이 끝난 뒤 일본인 관광객들이 꽤 온다"고 말했다.
환전소를 찾은 한 30대 일본인 여성은 "도쿄에서 미리 환전하려 했는데 은행마다 '원화가 다 떨어졌다'고 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난해 말 7, 8곳에 그쳤던 명동의 환전소는 최근 20곳 이상으로 불어났다. 한 환전상 할머니는 "원래 남대문시장에서 20년 넘게 이 일을 했는데 요즘은 해질 때쯤이면 명동으로 옮겨와 영업한다"고 말했다.
●자취 감춘 '깔세' 매장, 노점상 자릿세 껑충
엔화 강세 특수(特需)에 명동 상권의 몸값도 크게 뛰었다. 올 여름만 해도 명동에는 임차인을 구하지 못한 빈 점포가 적지 않았다. 보증금 없이 2~3개월치 월세를 미리 내고 장사하는 속칭 '깔세 매장'도 10여 곳에 달했지만 지금은 자취를 감췄다.
명동 H부동산 김모(62) 사장은 "임차인을 못 구해 반년이 넘도록 깔세로 놀리던 매장에 최근에는 화장품회사 2, 3곳이 서로 들어오겠다고 옥신각신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몰리자 명동 노점상 수도 최근 3, 4개월 새 2배 가까이로 늘었다. 목 좋은 노점상은 권리금이 1억 원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품목도 구두, 가방, 의류는 물론 양말, 모자, 액세서리 등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다양해졌다.
만두, 어묵꼬치, 호떡 등을 파는 길거리 음식점들도 대목을 맞았다. 핫도그를 파는 정모(30) 씨는 "쇼핑에 올인하는 젊은 일본인들은 주로 끼니를 간식거리로 간단히 해결한다"며 연방 미소를 지었다.
명동성당 앞에서 휴대전화 액세서리를 팔던 40대 남성은 "1000원짜리 휴대전화 액세서리 팔아 200원 남기는 장사로 자릿세 내기도 버겁지만 일본인 관광객 덕에 이 정도 벌이를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