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 어바웃 카툰’… 만화 마을 나카노
신주쿠에서 열차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나카노는 전자상가 밀집지역인 아키하바라(秋葉原)와 자주 비교된다. 도쿄 동쪽에 위치한 아키하바라가 전자제품과 게임 마니아들의 집합 장소라면 서쪽 나카노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수집가들의 메카다.
시끌벅적한 아키하바라와 달리 나카노는 아직도 수줍다. 이어폰을 낀 ‘나 홀로’ 관광객, 땅바닥에 앉아 만화책을 보는 아저씨 등 조용히 즐기는 ‘샌님’이 많다.
집결지는 나카노역 북쪽에 위치한 상가 ‘브로드웨이’. 그중 가장 핵심 장소는 바로 상가 3층에 위치한 중고만화 유통회사 ‘만다라케’다. 이곳엔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수만 권 이상의 중고 만화책이 책꽂이에 빽빽이 꽂혀 있다. 박스째로 만화책을 구매하는 고객들을 위해 대형 할인마트 계산대에서 보던 ‘컨베이어 벨트’도 있었다.
애니메이션 성지답게 만다라케를 중심으로는 일본의 대표 만화 캐릭터들의 피겨(figure) 가게들이 늘어섰다. ‘우주소년 아톰’의 아톰, ‘슬램덩크’의 강백호, ‘닥터슬럼프’의 아리 등 추억의 만화 주인공부터 짱구, 포켓몬스터 등 최근 만화 캐릭터까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또 만화 주인공 스케치 자료 판매 가게, 애니메이션 주제가 전용 음반 매장, 요술봉과 ‘꼬마마녀’ 가발이 걸린 ‘코스프레(costume play)’ 의상실까지… 기웃거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그래서 이곳에선 여기저기서 알람 소리가 ‘삑삑’ 울린다.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은 사람이 많기에. 알람 소리는 “정신 차려”라며 따귀 때리듯 매정하다.
○ 카페, 패션 그리고 여유… 아기자기한 지유가오카(自由が丘)
“시부야는 머리 아파.” “한적한 동네가 그리워.” “여유로운 도시는 없을까.”
시부야 옆 동네로 알려진 지유가오카는 이런 토론 끝에 탄생한 마을이 아니었을까. 아는 사람에겐 ‘쉼표’ 같은 마을. 지유가오카의 시계는 시부야보다 느리다.
지유가오카는 시부야역에서 도큐도요코센(東急東橫線)으로 여섯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의 성별은 ‘여성’이 아닐까.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아기자기한 카페와 개인 의상실이 많기 때문이다. 역 앞에는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꽃집들이 늘어섰고, 그 옆 산책로에서 강아지와 함께 뜀박질하는 동네 주민은 반갑다. 바쁜 듯하지만 여유로운 동네, 그래서 이곳에는 카메라를 든 한국인이 유독 많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는 바로 산책로 끝 부분에 위치한 케이크 카페 ‘스위트 포리스트’. 카페 마니아들의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진 이곳은 핑크 잎사귀가 흐드러진 카페 내부 장식이 특징이다. 시냇물 소리, 참새의 지저귐 등 효과음은 동화 속 숲에 있는 듯한 환상을 더한다.
‘카페’와 함께 지유가오카의 키워드는 바로 ‘패션’. 역 주변과 산책로에 흩어진 개인 의상실들은 패셔니스타들의 지갑을 유혹하고 있다. 최근 이곳에는 한쪽은 긴팔, 다른 한쪽은 민소매 형태의 재킷, 짝이 다른 신발 등 이른바 ‘언밸런스드 룩’이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를 즐기는 ‘패션 피플’은 찾아볼 수 없었다.
○ 낡은 서랍 속 ‘기록’… 진보초 헌책방 거리
진보초 헌책방 거리에 도달할 무렵, 눈보다 먼저 ‘트이는’ 것은 코였다. 퀴퀴한 책 냄새, 옛날 LP에서 풍기는 싸한 향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대표작 ‘상실의 시대’에서 주인공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데이트’ 장소로 진보초를 등장시켰다. 혈기 왕성한 남녀에게도 ‘옛것’에 대한 끌림이 우러났던 것일까.
진보초 헌책방 거리는 종합 서점 ‘산세이도(三省堂)’가 위치한 진보초 로터리에서부터 시작된다. 제작연도를 알 수 없는 먼지 쌓인 고서들을 옮기는 서점 주인들의 얼굴엔 책만큼의 연륜이 묻어났다. 행인들은 길거리에 앉아 고서의 책장을 넘기고 있다. 그들에겐 그곳이 도서관인 셈이다.
이곳엔 고서 찾기보다 더 즐거운 것이 숨어 있다. 바로 일본 대중문화를 이끈 아이돌 문화에 대한 자료다. 1970년대 아이돌 스타인 가수 야마구치 모모에(山口百惠)부터 1980년대 스타 마쓰다 세이코(松田聖子)와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의 브로마이드 판매소엔 이들을 기억하는 양복쟁이들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다.
헌책방 거리가 끝날 때쯤 ‘디스크 유니언’ ‘간다 레코드’ 등의 중고 음반 가게들이 오버랩된다. 1980년대 자글거리는 해적판을 청계천에서 샀던 국내 일본음악 팬들에겐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다. 7인치 도넛판(싱글 음반), 8cm 싱글 CD들이 먼지와 함께 진열된 이곳. 좁은 통로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이 등을 두드리며 곡성을 지른다. 그래도 즐겁다. 신주쿠 시부야에서 느낄 수 없는 ‘알콩달콩함’이 있기에….
도쿄=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