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하나 없이 깔끔한 유리 진열대와 전시 효과를 높이는 조명. 세련된 용모의 직원들은 흰색 면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작품’들을 다룬다. 이미 샤넬 핸드백을 팔에 낀 채 매장에 들어선 고객들이 새 상품을 품평하는 모습은 성급하거나 분주하지 않았다.
럭셔리. 이 단어만큼 오랫동안 철학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의 쟁점이 된 개념도 드물다. 고대 그리스에서 럭셔리는 나약함을 조장하는 사치로서 정치적 이슈가 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소비가 주는 만족감’이라는 의미가 더 부각되는 듯하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지난해 ‘트레이딩 업’이란 책에서 럭셔리 개념을 ‘올드 럭셔리’와 ‘뉴 럭셔리’로 구분했다. 이 책은 엘리트주의에 기반한 제품군은 올드 럭셔리, 소비자 소득의 향상에 따라 대중적 접근이 가능해진 제품군은 뉴 럭셔리로 나눴다. 소수 부유층 고객을 대상으로 했던 럭셔리가 대중 소비 사회에서 시장 차별화와 고객 분화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디자인 섹션 10회(최종 회)에서는 차별화된 고급 서비스로 슈퍼 프리미엄 이미지를 강조하는 올드 럭셔리(이하 럭셔리)와 대중으로 영역을 넓혀 나가는 뉴 럭셔리(이하 매스티지·Masstige) 트렌드를 다룬다. 전문가들은 럭셔리 브랜드가 추구하는 유·무형의 서비스야말로 가장 높은 수준의 디자인이라고 말한다.
○ 고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라
브랜드 홍수 속에서 매스티지와 경쟁을 벌이는 요즘 럭셔리의 승부수는 ‘차별화된 고객 맞춤형 서비스’이다.
샤넬, 에르메스, 루이뷔통, 구치 등 럭셔리 브랜드들은 1970년대까지 가업(家業) 형태의 태생적 한계로 인해 소수 상류 고객만을 위해 제품을 만들었다. ‘마케팅’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불과 5, 6년 전부터다.
그러나 전통과 장인정신을 내세우는 럭셔리 브랜드들이 경쟁이 치열하다고 해서 월마트 등 할인점들이 펼치는 대중적 마케팅을 시도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소수 엘리트 고객을 위해 장인정신을 발휘해 온 이들은 결국 고객 맞춤형 서비스라는 그들만의 마케팅 기법을 내놓았다.
일본 도쿄 오모테산도 루이뷔통 매장에는 ‘셀뤽스’라는 이름의 프라이빗 클럽이 있다. 2000달러(200만 원)의 가입비를 받는 이 클럽은 유명인과 소수 VIP 고객만 초대한다. 회원들은 ‘리미티드 에디션(한정제작)’ 제품을 가장 먼저 구입하거나, 부동산 강좌 등을 통해 인맥을 넓힐 수 있는 혜택을 받는다.
고객과 가장 가까운 접점인 매장 디자인도 럭셔리 브랜드가 중점을 두는 대목이다. 2년간의 개조 공사 끝에 지난해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중심가에 문을 연 7층짜리 초호화 루이뷔통 건물은 그 자체로 ‘파리의 명소’가 됐다.
다카시 무라카미 등 아티스트와 끊임없이 협업하는 루이뷔통은 예술적 감성이 물씬 풍기는 이 건물에서 고객이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6개월 이상에 걸쳐 만들어 주는 ‘맞춤 주문’ 서비스도 실시한다.
○ 프랑스에선 아시아 고객서비스 벤치마킹
럭셔리 시장의 절반은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에는 80여 개 럭셔리 업체의 연합회인 콜베르 위원회가 활동하며 자국의 럭셔리 마케팅을 도울 목적으로 ‘ESSEC’라는 상경대까지 설립했다. 이 학교의 인터내셔널 럭셔리 브랜드 매니지먼트 경영학석사(MBA) 과정은 우수한 마케팅 인력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 과정에 재학 중인 김현진 씨는 “경쟁적인 고객 서비스는 최근 럭셔리 디자인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며 “럭셔리 브랜드의 고향인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서비스 정신이 아시아 국가에 미치지 못해 오히려 아시아의 고객 서비스를 거꾸로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전했다.
차별화된 고객 서비스 디자인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럭셔리 업계는 호텔 사업에도 속속 진출하고 있다.
2004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호텔을 연 불가리는 올해 인도네시아 발리에 이어 세계 주요 도시 6곳에 호텔을 건립할 계획. 조르조 아르마니와 잔니 베르사체도 2008년 두바이에 특급 호텔을 선보일 예정이다. 부유층 소비자를 대상으로 고급스러운 브랜드 이미지를 공고히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 한국의 VVIP 고객 관리 디자인
국내에 진출한 럭셔리 브랜드들도 VIP 중 VIP인 VVIP 고객 관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달 말 샤넬은 롯데백화점 명품관인 에비뉴엘과 함께 롯데호텔에서 갈라디너 쇼를 열었다. 샤넬 고객 150명, 에비뉴엘 고객 150명을 초청해 샤넬의 신제품을 선보였다. 쇼가 끝난 뒤 샤넬의 트레이드마크인 동백꽃 장식이 달린 쇼핑백에 샤넬 메이크업 제품을 담아 선물로 증정했다.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국내에 처음 진출한 2001년에 대규모 고객 초청행사를 열었다가 이듬해부터는 ‘보다 개인적인 모임’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5명의 고객을 위한 소규모 패션쇼를 열거나 10명 내외의 팀을 꾸려 골프 모임을 갖는 식이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윤순근 팀장은 “우리 브랜드는 구매금액 기준으로 상위 100명의 고객이 매출의 16%를 차지한다”며 “브랜드 충성도도 높아 구입 순위가 거의 바뀌지 않는 이들을 더 친밀하고 가깝게 만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하이 주얼리 브랜드인 반 클리프 앤드 아펠은 고급 이미지 관리를 위해 2002년 국내 진출 이후 한 차례도 드라마 협찬을 하지 않았다. 대신 올해 브랜드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지난해 10월 홍콩에서 열린 보석 컬렉션에 두 팀의 국내 VVIP 고객을 초대했다.
국내에 희귀한 럭셔리 브랜드를 소개해 온 분더숍은 2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남성 단독 멀티숍을 내고 남성 럭셔리패션 시장 개척에 나서기도 했다. 쇼윈도에는 남성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는 모형 잠수함을 설치했다.
미국 뉴욕의 마케팅리서치 회사인 ‘럭셔리 인스티튜트’의 밀톤 페드라자 사장은 최근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말만큼 럭셔리 브랜드들의 전략과 고민을 담은 말도 없을 듯하다.
“우리는 ‘체험 경제’ 속에 살고 있다. 고객은 그 쇼의 주인공이자, 스타이다.”
글=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그래픽=이진선 기자 geran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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