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봄,컬러의 아우성

  • 입력 2008년 2월 22일 02시 55분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년 시인 이상화가 바라던 그 ‘봄’은 ‘해방’이었다.

82년이 지난 2008년. 또 하나의 아우성이 들린다. “빼앗긴 컬러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패션계의 소리 없는 외침이다. 이는 검은색,흰색,회색 등이 지배한 미니멀리즘 세상에 대한 반발과도 같다.

국내를 비롯해 이탈리아 밀라노,프랑스 파리,미국 뉴욕 등 세계 패션쇼 무대 위의 옷들은 저마다 개나리,진달래 빛으로 갈아입었다.

흑백TV 같던 세상이었다. 색도,치장도 모두 최소화된 것만이 미덕이었던 세상은 마치 ‘컬러 전쟁’이라도 터진 듯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올해는 특히 노랑,빨강,주황 등 ‘꽃미남’이나 ‘몸짱’도 도전하기 힘들었던 비비드 컬러(원색)와 애시드 컬러(형광등)가 ‘금기’의 영역을 박차고 나왔다.

이에 대한 관점은 두 가지다. ‘루이비통’의 수석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가 컬러는 ‘재미난 것(Fun)’이라고 한 반면 지난해 사망한 디자이너 잔 프랑코 페레는 우아한 ‘로맨스’로 해석했다.

자,이젠 전 세계 디자이너들이 땀 흘려 만든 그들의 컬러TV를 돌려 보자.

리모컨의 주인은 바로 당신이다. 때로는 즐겁게,때로는 로맨틱하게 전 세계를 수놓을 이들,과연 2008년 봄 ‘컬러 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


▼촬영·편집 : 박영대 기자

“무채색은 가라” 원색의 전쟁 불붙다

● 우리들의 즐거운 컬러… “Color is Fun”

▼즐거운 콘셉트▼

저마다 색색의 가방을 든 12명의 간호사. 비닐 소재 가운 넘어 보이는 색색의 속옷을 자랑하며 무대를 휘젓는다. 금방이라도 가운을 찢을 듯한 도발적인 ‘나이팅게일’의 후예들이다. 이곳은 프랑스 파리 ‘루이비통’의 2008년 봄 패션쇼 현장이다. 올봄 루이비통의 주제는 ‘간호사’. 미국의 사진작가이자 미술가인 리처드 프린스의 작품 ‘간호사’에서 영감을 받았다. 마크 제이콥스는 그들의 비닐 가운 속에 숨겨진 ‘원색’ 속옷에 포인트를 뒀다.

‘셀린’의 수석 디자이너 이바나 오마지시는 디지털 문화와 컴퓨터세대 이미지를 원색으로 표현했다. 가슴에 일명 ‘IC칩’ 디자인을 한 다홍색 드레스부터 컴퓨터 주변기기 ‘전선 꼬임’을 빨간색, 파란색으로 표현한 ‘서킷(Circuit)’ 스트랩 슈즈 등이 대표적이다.

단순히 빨강이나 파랑만 늘어놓던 시대는 지났다. 명확한 주제가 있어야 패션이 되는 법이다. 파스텔톤 노란색과 흰색, 푸른색 등이 얽힌 이탈리아 브랜드 ‘디젤’의 의상은 세탁기 속 빨래와 세제가 뒤섞여 돌아가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 또 환경을 주제로 원색을 사용하기도 했다. ‘마르니’는 녹색, 주황 등으로 ‘친환경’ 의상과 액세서리로 ‘솔방울’ 모자까지 만들었고 ‘펜디’는 무지개를 주제로 타원 무늬와 7개의 색을 스커트에 새겼다.

즐거운 캔버스

‘프라다’의 세컨드 라인인 ‘미우미우’는 올봄 한 폭의 그림을 내놨다. 빨강 노랑 파랑 등 모자이크 유리창을 비롯해 여성의 얼굴, 그리고 줄에 매달린 피에로 그림이 그려진 검은색 미니 원피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의상을 마치 ‘도화지’처럼 여기는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의 상상력이 빛난다는 평가를 받았다.

올봄 패션과 예술의 만남은 화려하고 선명한 것이 특징이다.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해 예술 작품으로, 또 패션 아이템으로 모두 극명하게 나타내려 한다. 미국 출신의 추상주의 화가 잭슨 폴록이 참여한 이브생로랑의 남성 구두는 회색 구두에 빨강, 노랑, 파랑 등 물감을 자유롭게 묻혀 만들었다. 루이비통의 ‘모노그램 카툰’ 가방은 노란색, 자주색 바탕에 리처드 프린스의 만화 한 장면이 새겨져 있다.

즐거운 무늬

원색이 원색 하나만으로 빛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해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 프리다 지아니니는 아마 고개를 가로저었을 것이다. 원색을 더 돋보이게 하는 무채색 무늬 덕분에 노란색 구찌 원피스가 빛을 발하지 않았을까.

‘욱일승천기’를 연상케 하는 현란한 검은 줄무늬 스커트에 대비되는 노란색 톱, 검은 기하학 꽃무늬와 노란색을 섞어 만든 원피스 등은 모두 노란색을 더 극명하게 해준다. 무늬 자체가 원색과 함께 어우러진 의상도 선보였다.

‘데칼코마니’ 스타일의 알렉산더 매퀸의 미니원피스, 빨간색 얼룩무늬로 이루어진 ‘마르니’의 미니원피스, ‘프라다’의 청록색 체크무늬 남성 바지 등이 대표적이다.

즐거운 파괴

원색은 ‘파격’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튀는 것은 색뿐만이 아니다. 원색 패션의 즐거움은 바로 ‘디자인 파괴’에 있다. 루이비통이 선보인 ‘브로큰 슈즈’는 노랑, 핑크를 구두 전반에 입히면서 구두 옆 쪽 라인을 잘라 내 비대칭 형태를 나타낸다. ‘별 구두’라 불리는 이브생로랑의 스트랩 슈즈는 뼈대를 최소화하는 대신 빨강 파랑 초록의 별 장식을 구두에 달아 검은색 구두이지만 전반적으로 화사한 느낌을 준다.

한편 수십 마리의 빨간 나비로 만들어진 알렉산더 매퀸의 ‘나비 모자’나 핑크 원피스에 맞춰 쓰는 ‘검도 마스크’ 등 전례 없던 아이템들도 주목받고 있다.

● 우리들의 로맨틱한 컬러… “Color is Romance”

로맨틱 꽃무늬

올봄 원색 패션이 되찾고자 하는 것은 바로 ‘여성성’이다. 미니멀리즘 시대 ‘매니시룩’, ‘톰보이룩’ 등 남성적인 여성을 강조했다면 ‘맥시멀리즘(Maximalism·과대 패션)’ 시대는 우아하고 여성스러움을 추구한다. 이에 다시 고개를 든 것이 바로 ‘꽃무늬’다.

특히 올봄 프라다의 ‘꽃’ 사랑은 남다르다. 지난해 가을겨울 선보인 ‘그라디에이션(경계선의 색이 희미하게 변하는 효과)’ 스타일에 이어 올해 가방 앞부분에 실제 모형 꽃이 붙어 있는 ‘원색 꽃 가방’ 라인을 내놨다. 여성 구두 역시 꽃 장식은 기본이고 뒷굽에도 꽃무늬 장식이 돼 있을 정도다. 이 밖에 ‘샤넬’은 앞가슴에 큰 꽃 장식이 달린 빨간색 여성용 정장과 함께 ‘발목 지갑’을 세트로 내놨다. ‘페라가모’는 연두색 꽃무늬가 입체적으로 장식된 드레스를 선보였다.

큼지막한 꽃무늬 프린트의 경우 시원한 느낌을 주며 색도 다양해 화려하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매퀸의 꽃무늬 드레스는 빨주노초파남보 등 7가지 색이 옷 전체에 퍼져 현란한 느낌을 준다.

로맨틱 사이즈

로맨틱하다 못해 ‘관능적’이라면 그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하늘에 있는 디자이너 지안 프랑코 페레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가 선보인 보랏빛 실크 드레스와 ‘와이드 팬츠’는 보라색이란 색감, 그리고 물결치듯 나풀거리는 부피감이 마치 남성을 유혹하듯 도발적이다.

단순할수록, 무심할수록, 치장을 최소화할수록 각광받던 것이 미니멀리즘 시대의 아름다움이었다면 원색 패션 시대에는 최대한 풍성하고 질질 끌리는 등 ‘부피감’이 곧 아름다움이다. ‘A라인’을 강조하는 ‘디스퀘어드 2’의 핑크 롱 드레스, 리본 매듭이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빨간색 롱 드레스는 모두 넓고 큰 부피를 자랑한다.

실크, 시폰 등의 소재 외에도 부피감을 주기 위해 일명 ‘잠자리 날개’라 불리는 투명한 ‘오르간자’ 원단이 올봄 눈에 띄는 것이 특징이다. 펜디의 ‘무지개 원피스’를 비롯해 ‘면사포’와 ‘웨딩드레스’를 연상케 하는 루이비통의 파란색 ‘오르간자 원피스’가 대표적이다.


▼촬영·편집 : 박영대 기자

● 컬러 전쟁은 긍정의 메시지?

원색 컬러들의 향연은 미니멀리즘에 이어 자연스럽게 나타난 패션 경향이라는 것이 패션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그간 무채색으로 대표됐던 심심한 패션계에 새로운 자극제가 필요했고 이러한 분위기가 맥시멀리즘의 한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패션계의 흐름으로만 보기엔 표피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는 그간 제기돼 온 1980년대 복고 경향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다. 원색 패션이 가장 호황기를 누렸고 경제적으로도 팽창을 하던 시기이기에 당시의 ‘풍요’를 그리워하는 움직임이 패션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동덕여대 의상디자인학과 김혜경 교수는 “패션을 비롯한 문화, 경제 등 사회 전반이 오랫동안 침체돼 있었다”며 “밝고 긍정적으로 살기 위해 원색 패션을 하나의 신선한 자극제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친환경 패션’이 주목받으면서 빨강, 노랑 등 따뜻한 느낌의 원색이 각광을 받고 있다. 태양, 땅, 나무 같은 자연물을 형상화하는 데 빨강, 노랑, 초록 같은 원색이 사용되고 지구 온난화 같은 환경문제를 원색으로 나타내는 등 조연에 머물렀던 원색이 자연의 색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경향은 ‘대세론’보다 ‘혼합론’으로 풀이된다. 삼성패션연구소 노소영 연구원은 “현재의 원색 패션과 로맨티시즘이 합쳐진 것처럼 앞으로는 여러 개의 유행이 혼합된 형태로 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미니멀리즘 역시 원색 패션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며 공존해 나갈 것”으로 내다봤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같은 계열의 원색은 피하라▼

원색 패션이 아무리 유행한다 해도 이를 제대로 소화하기란 쉽지 않다. 패션 관계자 3인이 추천하는 원색 패션 아이템, 그리고 원색 패션 연출법을 들어본다.

1. 두 가지 이상의 색을 연출할 땐 다른 원색 이용

원색 패션 연출은 과감한 시도지만 아무 색이나 덧입으면 ‘패션꽝’을 면치 못한다. 두 가지 이상의 색을 연출할 경우에는 같은 계열의 색보다 다른 원색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노란색 셔츠라면 겨자색, 레몬색 등 채도가 다른 노란색 계열보다는 흰색, 보라색 등 아예 다른 원색을 입어야 한다.(스타일리스트 한혜연)

2. 미니멀리즘을 이용하라

지난해 미니멀리즘 열풍으로 갑자기 원색 옷을 입는 것은 쉽지 않다. 한번에 소화하려 하지 말고 미니멀리즘과 함께 섞어 적응하며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색 티셔츠+검은색 바지’나 ‘무채색 의상+원색 가방, 신발’ 등으로 조금씩 시도를 해야 한다. 이것도 겁난다면 손톱에 원색 매니큐어부터 바르는 것은 어떨까? (디자이너 조성경)

3. 이너웨어에 무게중심을 둬라

올해 원색은 로맨티시즘과 맞물려 무조건 튀는 것보다 여성스럽게 연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겉옷보다 속옷에 포인트를 두어 은은하게 연출해야 한다. 핑크 티셔츠나 베스트(조끼) 등을 입고 흰색 재킷이나 검은색 카디건을 덧입는 ‘레이어드(겹쳐 입기)’ 스타일이 좋다.(스타일리스트 정윤기)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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