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진 “서양 모델에 안꿀려”
# 클릭
“나니깐. 나만 할 수 있는 거야!”
미니 홈피 첫 화면부터 당당하네. 이름을 보니 박혜림. 모델 혜박. 1985년생. 모습은 ‘독기’가 서려 있는 듯 강하네. 그 흔한 쌍꺼풀도 없군… 가만, 근데 이 사람 지금 어디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거지? 샤넬, 프라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패션쇼?
# 검색
“옹니(언니). 나 미국 도착. 언니는 언제 와?”
혜박이 ‘언니’라고 말한 미니 홈피 1촌은 누굴까? 이름 한혜진. 1983년생. 쌍꺼풀 없는 눈은 혜박만큼이나 동양적이군. 2006년부터 5시즌 연속 3대 패션쇼 진출했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동양적인 스타일이 대세인가?
혜박(23)을 검색하면 딸려 나오는 단어는 바로 한혜진(25). 한혜진을 클릭하면 역시 혜박이 보인다. 10년 전 ‘감히’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던 한국 모델의 세계 데뷔는 이제 ‘드디어’라는 수식어로 바뀌었다. 2005년 박혜림이 혜박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고 이듬해 2월 한혜진이 데뷔해 구찌, 프라다, 샤넬, 루이비통,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의 명품 브랜드 패션쇼를 휘젓고 있다. 두 ‘포카혼타스’가 선보이는 ‘오리엔털 뷰티’는 서구 사회에 던지는 동양인의 ‘성장’ 그 자체일지 모른다.
상반기 해외 패션쇼 일정을 마치고 함께 샴푸 광고에 출연하기 위해 지난달 말 같은 시기에 한국을 찾은 이들을 각각 따로 만났다.
#1… 날 키운 건 8할이 불안함
혜박은 올해로 7번째의 패션쇼를, 한혜진은 5번째 패션쇼를 끝냈다. 데뷔 2, 3년 남짓하지만 전 세계 모델 순위를 발표하는 인터넷 사이트 ‘모델스닷컴’에서 혜박은 ‘여성 모델 Top 50’에서 18위에 올라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20위권 안에 들었다. 한혜진도 세계 무대 진출한 첫 해인 2006년 ‘신인 모델 Top 10’에 당당히 뽑혔다.
▽한혜진(한)=올해 갑자기 ‘서른 후엔 무슨 일을 할까’ 하는 고민이 들더군요. 그간 100m 달리기처럼 앞만 보고 달린 건 아닌가. 여성으로서 가장 아름답고 빛날 때만 할 수 있는 직업이 바로 모델 일인데 나이가 들면 못할 것 같아 불안하거든요.
▽혜박(혜)=언제까지 세계무대에서 활동할지 몰라요. 이번 뉴욕 컬렉션에서는 지난해보다 유색 인종을 덜 쓰는 분위기였어요. 동양인 모델이 점점 늘다 보니 디자이너들도 별 흥미를 못 느끼죠. 사람들은 쇼 개수가 하나라도 줄면 ‘벌써…’라며 지레 걱정을 하잖아요.
이번 패션쇼가 얼마나 화려했는지 자랑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심각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세계무대에 설 때마다 진지해졌다고 해야 할까?
혜박 “내 외모? 30점 정도?”
한혜진 “화가 되려다 낚였죠”
#2… 못난이 콤플렉스
두 모델의 가장 큰 공통점은 뭐니 뭐니 해도 동양적인 외모. 찢어진 눈, 얇은 입술, 쌍꺼풀 없는 눈 등으로 대표되는 혜박의 외모에 대해 ‘루이비통’의 수석디자이너인 마크 제이콥스는 여전히 “혜(박)는 못 생겼어”라고 대놓고 놀린다. 지금까지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이들은 오히려 ‘못생겼다’에 가깝다.
▽한=전 앞니가 올라가서 어릴 적 ‘토끼’라는 별명을 달고 살았어요. 거기에 매부리코, 올라간 입술, 큰 손 등등 결점이 너무 많았죠. 마른 체형을 극복하기 위해 옷도 최대한 크게 입었죠.
▽혜=진짜 쌍꺼풀 수술 하고 싶어요. 외모만 따지면 전 30점 정도? 그런데 어느 날 일본 패션 잡지에서 무지 동양적으로 생긴 모델을 봤는데 나름대로 매력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어요. 모델은 외모로 하는 일이 아니라 열정으로 하는 일이라 생각했거든요.
백인 모델만 고집했던 ‘버버리’가 동양인 처음으로 혜박을 내세워 이미지 변신을 꾀했고 ‘샤넬’, ‘프라다’도 이어 그를 ‘최초의 동양인 모델’로 홍보전을 폈다. 한혜진 역시 샤넬, 루이비통 등에서 활약했으며 ‘안나수이’ 패션쇼에서는 동양인 최초로 피날레를 장식하기도 했다.
▽한=전 정말 행운아죠. 10년 전 이소라, 오미란, 박둘선 선배가 활동했을 때였다면 전 절대 안 됐을 거예요. 하지만 모든 게 운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과거보다 체형 자체가 서구화됐고 키 큰 사람도 한국에 넘치잖아요. 미의 기준도 점차 달라지고 있고. 그래서 전 지금도 서양 모델들에게 전혀 꿀리지 않아요.
#3… 대기만성 vs 전화위복
함께 세계무대에 서기까지의 과정은 서로 달랐다. 고사성어로 표현하자면 혜박은 ‘대기만성(大器晩成)’, 한혜진은 ‘전화위복(轉禍爲福)’쯤 될까?
중3 때 영어 공부를 위해 부모님과 함께 미국 유타 시로 이민 간 혜박은 모델이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대학생이 될 때까지 꿈을 접어야 했다.
유타주립대 생물학과에 입학하자마자 그는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하루 10개가 넘는 지역 모델 선발대회에 참가했다. 다행히 몇 군데에서 그에게 ‘러브 콜’을 보내왔지만 본격적인 난관은 그 다음부터였다.
▽혜=워킹이나 포즈 지적을 많이 받았어요. 체계적인 교습을 받을 방법이 없어서 그냥 세계 유명 모델들의 패션쇼 동영상을 컴퓨터로 틀어 놓고 밤새도록 연습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밤새 혼자 끙끙대고 연습해서 저만의 스타일을 터득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반면 한혜진의 어릴 적 꿈은 모델이 아닌 화가였다. 하지만 예고 입시에서 떨어졌고 실망감에 사로잡힌 것도 잠시, 어머니는 그에게 ‘모델’ 얘기를 꺼냈다.
▽한=황당했죠. 패션이 뭔지, 옷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촌스러운 아이였거든요. 그저 저조차 무서울 정도로 키가 자라고 있는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죠. 그래서 교복 입고 화실 다닐 때 기획사 관계자들로부터 명함도 많이 받았죠. 키만 커서 될 일은 아니었다. 1998년 열 다섯의 나이로 나간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그는 본선 진출도 못한 채 떨어졌다. “그냥 공부나 하자”라며 마음을 고쳐먹나 싶었지만 그를 유심히 본 전 소속사 사장이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3개월의 트레이닝을 거쳐 1999년 모델로 데뷔했고 2006년 세계무대까지 진출했다.
#4… 서로 다른 라이벌, 같은 동양인
미니 홈피 1촌 관계가 이들 사이의 전부는 아니었다. 세계 무대 데뷔는 혜박이 한혜진보다 1년 선배지만 국내 활동까지 합치면 한혜진이 혜박의 6년 선배다. 또 ‘모델스닷컴’ 순위로 보면 혜박이 우위에 있지만 한혜진은 이번 시즌 등장한 패션쇼 횟수만 70회에 가깝다.
▽혜=라이벌이라는 말 자체가 서운해요. 동생으로서 혜진 언니에게 많이 기대요. 2년 동안 함께 세계무대에 서면서 같이 밥 먹고 술도 마시는 사이가 됐는데 같이 활동하는 동료일 뿐이지….
▽한=어느 정도 자극은 되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필요악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저희가 싫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둘 다 성격이 털털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아요.
사실 이들이 염려하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올해 1월 ‘포드 슈퍼모델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모델 강승현. 동양인 모델 시장의 ‘파이’가 줄어든 셈이니 경계심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혜=안 그래도 지난달 잡지 촬영 때 만났는데 생긴 것도 저와 비슷하더라고요. 솔직히 약간의 경계심은 들죠. 하지만 그런 거 일일이 따지면서 살기엔 너무 복잡하죠? 그냥 지금을 즐겨야죠.
하지만 “고생길이 훤하다”라며 강승현을 격려한 이들의 본심은 다른 데 있었다. 아직도 곳곳에 자리 잡은 동양인에 대한 차별. 동양인은 영어를 못하고 한계가 있다는 생각은 당당히 워킹을 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다. 혜박은 “‘샤넬’ 패션쇼 모델 50명 중 내가 서면 ‘동양인 한 명이면 된다’라는 말을 한다”며 “아직도 동양인은 실력과 상관없이 특이한 존재로 평가받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한=한국이란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 지도 몰라요. ‘너 북이냐 남이냐’ 이런 질문만 늘어놓죠. 유명 디자이너들이 일본이나 중국의 고유문화에서 영감을 받아 옷을 만들 때면 부럽기도 해요. 우리도 충분히 자랑스러운 문화를 지니고 있지만 너무 세계화, 국제화만을 외치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들어요.
#5… 역사는 계속돼야 한다
‘외로운 싸움이다’, ‘동양인 차별이 끊이질 않는다’ 하더라도 둘은 모두 “한국 모델이 계속 진출해야 한다”라고 했다. 세계적인 모델로 성공하기 위해 후배에게 강조하는 것은 자신감, 영어, 그리고 개성이었다.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도도하게 포즈를 취하는 이들도 ‘다른 종자’는 아니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화려한 의상을 입지만 평소 즐겨 입는 옷은 청바지에 티셔츠. 혜박은 “동대문 패션상가에 가서 값 깎아 싸게 살 때 가장 행복하다”며 웃었다.
반면 직업병에 끙끙 앓기도 한다. 늘 높은 굽 구두를 신고 꼿꼿이 서 있기에 허리는 물론이고 무릎, 발목 등 성한 데가 없다. 몸매 관리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강한 화장품에 피부가 상하기도 한다. 한혜진은 “때론 부모님 원망도 많이 했다”며 “다시 태어나면 모델 안 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목표‘를 묻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혜박은 “동양인 최초로 미국판 ‘보그’지 표지 모델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혜진은 “당장 다음 시즌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설 지 계획을 짜는 것”이라고 했다. 조금 전까지 “다신 모델 안 한다”는 말은 눈 녹듯 사라졌다. “나니깐, 나만 할 수 있는 거야”라는 미니 홈피 제목처럼….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