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불친절한 패션쇼는 입장부터 남달랐다. 행사안내 표지판은 없었고 연예인용 레드 카펫이나 포토라인은 애초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전체 72만 m²나 되는 큰 공간에 ‘쥐구멍’ 출입구라니. 빚쟁이 피해서 도망가는 느낌으로 입장해야 하는 건 왜일까. ‘금단의 도시(Forbidden City)’는 행사 시작 전부터 비밀스러웠다. 공기마저도 을씨년스러웠던 지난달 24일 오후 9시 중국 베이징(北京) 쯔진청(紫禁城). 그곳에서 일본 ‘아방가르드 패션’의 대가로 통하는 일본 출신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야마모토 요지(山本耀司·65)의 브랜드 ‘와이즈(Y's)’ 단독 패션쇼가 열렸다.》
중국 민간 외교사업 단체인 ‘중국 외교사절단(CPAFFC)’의 초청을 받아 일본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중국 베이징에서, 그것도 쯔진청에서 패션쇼를 여는 것이다. ‘와이즈’는 국내를 비롯해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 전 세계에 매장을 두고 있는 브랜드. 하지만 웅장할 것만 같던 패션쇼는 뚜껑을 열어본 결과 ‘소수 정예’를 위한 건조한 파티였다.
쿵쾅대는 현란한 댄스뮤직이나 화려한 조명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닭살이 돋을 만큼의 서늘한 날씨 속에서 단 한마디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래서 침묵의 ‘육중한’ 무게를 실감할 수 있었던 일본 패션 거장의 중국 나들이에 국내 일간지로는 유일하게 초청받았다.
○ 검은 침묵, 검은 쯔진청
이날 초청받은 관객은 모두 500명. 중국, 일본 패션계 관계자를 비롯해 프랑스, 미국 등 파란 눈의 서양인들도 보였다. 야마모토 요지가 1981년 파리에 진출했고, 아디다스, 에르메스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와 합작품을 선보였으니 행사장 내 서양인들의 참가만 보더라도 그의 인지도를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다.
표지판 하나 없이 흰 등불 몇 개만 놓인 행사장에 500명의 관객은 입을 다문 채 오로지 초대장 하나만 들고 이동했다. 5분을 걷고 나니 ‘요지 야마모토(서양식 이름 표기법)’라 적힌 자주색 대문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Y's’ 로고가 적힌 수백 개의 세로 형광등이 패션쇼장의 벽을 가득 채운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닥은 황토색 나무판자가 여러 겹 놓여 있었고 이것이 오늘의 무대임을 알 수 있었다. “패션 이외의 것은 불필요하다”는 그의 평소 생각과 딱 떨어지는 조촐한 무대가 아닐 수 없었다.
‘무음’의 공간을 가른 것은 기타 소리였다. ‘띵’ 하는 느릿느릿한 포크송은 다른 패션쇼장에서는 들을 수 없는 독특한 소리였다. 이윽고 ‘완두콩 껍질’ 같은 긴 검은색 모자를 쓴 여성모델이 금단의 도시를 뚫고 나왔다. 일명 ‘빅 룩(Big Look)’이라 불리는 땅을 질질 끌 정도의 큰 부피, 재단하다 만 것 같은 ‘누더기 패션’ 등 평소 ‘요지 스타일’이라 불리는 파격적인 의상에 500명의 관객은 숨죽이며 모델의 동선에 눈을 고정시켰다.
깎아놓은 듯한 아름다움, 완벽한 대칭과는 거리가 먼 그의 패션 철학은 패션쇼 내내 이어졌다. 핫핑크색 투피스를 그냥 찢어 입은 듯한 의상, 하늘하늘한 시폰 소재의 원피스를 마치 ‘몸뻬 바지’처럼 돌돌 말아 올린 의상 등은 고정관념 타파 그 자체였다.
남성 의상 역시 전 세계 유행인 ‘슬림 룩’과는 거리가 먼 땅에 닿을 정도의 부피 큰 코트, 재킷 등이 주를 이루었다. 색감은 검은색을 메인 테마로 파란색과 빨간색 등 원색을 적절히 섞었다. 특히 주목받은 것은 검은색 코트 밑 끝 부분이 갈라진 일명 ‘플리츠 코트’로, 걸을 때마다 속 색깔인 빨간색이 도드라져 주목을 받았다.
○ 비대칭, 누더기… 파격의 쯔진청
쇼는 느릿느릿 진행됐지만 무대는 숨 막힐 정도로 파격의 연속이었다. 이날 선보인 60벌의 의상은 모두 쯔진청 패션쇼를 위해 그가 특별 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끈 것은 그의 비대칭 스타일이었다. 벨트 두 개, 비대칭적인 단추 등 외향적인 것은 기본이었다. 검은색의 미니멀리즘 패션을 선보이나 싶다가도 모델이 재킷을 벗자 큼지막한 빨간색 꽃무늬가 셔츠 전체를 뒤덮은 모습, 검은색 나일론에 파란색 가죽 천을 불규칙하게 덧대 만든 여성 원피스와 구두, 검은색 장미가 비장하게 장식된 ‘X자’ 드레스 등 어느 것 하나 평범함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미스터리하다고 느낄 때쯤 말끔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녀 커플 셋이 무대를 갈랐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프 이즈 어 미스테이크(Life is a mistake)”라는 메시지와 함께 엄청난 부피의 흰 천을 두른 모델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쇼는 끝났다. 엔딩 곡도 없었다. “뭐야” “뭐지”라고 웅성거리는 중국인들 사이로 “원더풀” “그레이트”라며 손을 치켜든 서양인들….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야마모토 요지, 혹은 요지 야마모토의 중국 첫 나들이는 그렇게 답이 없었다. 불친절하게도 그는 명확한 메시지를 주지 않았다. 마치 패션쇼장 한 귀퉁이에 걸린 ‘와이즈’의 ‘Y’가 ‘Why’로 보이는 것처럼.
베이징=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