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내다 못해 퍼붓는 아줌마.
아들의 결혼식 도중 예비 며느리가 위경련을 일으켰다. 식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하지만 그는 며느리 상태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도도하고 우아한 자신의 모습이 구겨진 것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뿐이었다.
KBS2 TV 주말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속의 우아한 아줌마 고은아(장미희 분)에 대한 시청자 시선은 이율배반적이다.
“참 철없다” “이기적이다” 하며 나잇값 못하는 행동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하고 나온 ‘럭셔리’한 패션에는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니.
특히 그의 목과 귀에서 반짝거리는 보석에 침을 ‘꼴깍’ 삼키는 여성들은 오로지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 걸까? 그가 하고 나온 보석 브랜드 ‘드비어스’의 ‘와일드 플라워’ 시리즈 5000만 원짜리 한 세트(목걸이, 반지, 귀고리)가 최근 세 개나 팔렸다. 이보다 훨씬 비싼 3억 원 상당의 3캐럿 반지도 최근 ‘장미희 반지’라며 한 백화점에서 당당히 팔렸다.
“전자는 여성 고객들이, 후자는 남성 고객이 사갔다”고 밝힌 드비어스의 심효정 대리는 “100만 원대 중저가 보석 상품의 경우 PPL(간접 광고)로 효과를 더러 보지만 1000만 원 이상 제품이 팔린 것은 극히 드문 경우”라고 말했다.
#2. “이젠 패션이죠…”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 내 ‘한가람미술관’을 찾은 직장인 이수진(27·여) 씨.
이곳에서 하는 ‘티파니 보석전’을 이 씨는 세 번이나 찾았다. 이 곳에는 ‘바위 위에 앉은 새’ 같은 유명한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비롯해 170년간 제작된 미국 보석브랜드 ‘티파니’의 대표작 200여 점을 전시해 놨다.
이 씨는 “보석은 사치가 아니라 패션 액세서리이자삶의 목표”라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목표냐고 묻자 그는 “‘티파니’의 ‘노보’링을 사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음 달 8일까지 이어지는 이 보석전에 하루 평균 1500∼2000명, 주말에는 3500명의 관객이 찾고 있다.
관객의 절반은 서른 살 미만의 젊은 층이다.
현재까지 유료 관객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10대와 20대가 전체 관람객의 52.1%를 차지해 30대(38.4%), 40대(8.2%)를 압도했다. 국내에서 처음 열린다는 사실도 매력적이지만 인기 비결은
다른 데 있었다. 이번 보석전을 기획한 기획사 ‘솔대’의 김수아 대리는 “20대 초반의 남녀가 데이트를 하기 위해 들를 정도로 보석에 대한 관심이 젊은층으로 넓어졌다”며 “그만큼 보석에 대한 국내 시장의 잠재력이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 지상으로 내려온 보석, 허리를 낮추다
보석은 언제나 과묵했다. 하지만 그 주위 사람들은 늘 시끄러웠다. 이수일을 사랑하던 심순애가 김중배의 ‘다이아’ 반지 하나에 마음이 흔들렸고 ‘대도(大盜)’ 조세형이 늘 고위층 저택에서 훔친 것은 바로 ‘물방울 다이아’였다. 보석은 그렇게 있는 자, 없는 자 편을 갈랐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 꼿꼿한 보석이 친근해지기 시작했다. ‘티파니 보석전’을 비롯해 ‘까르띠에 소장품전’, 얼마 전 서울 중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있었던 ‘반 클리프 앤드 아펠-영원의 보석’ 등 올해들어 서울에서만 명품 브랜드 보석전이 세 개나 열렸다. 여기에 ‘보석=복부인’의 등식이 성립되던 과거 형이상학적 보석은 확실한 주제를 통해 그간 닫힌 빗장을 서서히 풀고 사람들과 재잘대고 있다. 이른바 보석이 변하는 시대가 찾아왔다.
①자연주의 보석=보석이 쉬워진 결정적인 계기는 보석이 형상화하는 주제가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파인 주얼리를 비롯한 브리지 주얼리, 커스튬 주얼리 등 최근 보석계의 화두는 이른바 ‘에코리즘’으로 대표되는 자연주의다. 꽃, 달, 별 등 주변의 자연을 시작으로 동물까지 보석 주제로 떠올랐다.
프랑스 명품브랜드 샤넬은 올봄 샤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카멜리아(동백꽃)’를 주제로 한 ‘카멜리아’ 라인을 선보였다. 검은색과 흰색의 ‘미니 카멜리아’와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옐로 골드’로 만든 ‘카멜리아 아주르’ 등 2가지로 구성돼 있다.
‘LVMH’ 계열의 프랑스 보석브랜드 ‘프레드’에서는 최근 달과 별을 주제로 한 새로운 브랜드 ‘미스 프레드’를 만들고 총 10개의 액세서리를 공개했다. 국내에도 청담동 매장과 압구정동 갤러리아백화점 등 2개의 매장을 열었다. 프레드 마케팅팀의 김승은 팀장은 “친환경 패션, 재활용 가방 등 패션에서 ‘친환경’ 열풍이 인 것과 연관이 있다”며 “전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갖고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말했다.
동물의 경우 오스트리아 브랜드 ‘스와로브스키’의 ‘판다곰’ 액세서리를 들 수 있다. 크리스털과 검은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이 액세서리는 ‘멸종 위기의 동물’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으며 구입비 일부는 환경 캠페인에 자동 기부된다.
②실용주의 보석=수백 개의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가 박힌 보석을 식빵 봉지 위에서 발견한다? 보석이 보석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은 루이비통의 ‘태그 팬던트’를 보기 전 얘기나 다름없다. 지난해 말 현대미술가 리처드 프린스와 손잡고 2008 S/S 패션쇼를 연 루이비통은 그의 아이디어를 빌려 이른바 ‘실용 보석’을 만들었다. 루이비통 로고가 새겨진 이 제품은 목걸이뿐만 아니라 식빵 봉지를 잠그는 ‘태그 네클리스’를 형상화했다.
정보기술(IT)시대인 만큼 전자제품과 보석을 결합한 제품도 인기다. 1기가에 24만 원 하는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 USB ‘액티브 크리스털’이 주인공으로 지난해 말 판매 10일 만에 유럽 전역에서 30만 유로(약 4억 원)어치 매출을 올렸다. 스와로브스키 정상희 커뮤니케이션팀장은 “전자제품과 패션을 소중히 여기는 현대 여성을 타깃으로 크로스오버적인 보석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스와로브스키는 크리스털 이어폰, 크리스털 전구를 내놨으며 가을에는 새로운 크리스털 USB를 공개한다.
○ 달콤한 보석의 민주화 시대?
보석 대중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계기를 전문가들은 이른바 ‘셀프 링’족(族) 등장을 꼽는다. 티파니의 ‘셀러브레이션 링’을 비롯해 프레드의 ‘석세스 링’, 드비어스의 ‘여성들이여, 오른손을 들어라’ 캠페인 등 명품 브랜드들의 반지 마케팅은 미시족, 알파걸 등 사회적으로 입지를 다진 2030 ‘커리어 우먼’을 보석 구매의 주체로 만들었다. 비록 “교묘한 명품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비판 여론도 있었지만 여성들은 스스로 반응했다. 드비어스의 경우 샐프 링의 매출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통계청이 발표한 국내 귀금속 시장 매출규모는 2003년 1조4400억 원에서 2006년 1조5440억 원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보석 디자이너 최금숙 씨는 “비공식 매출까지 합치면 매출규모는 4조 원 가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뿐만이 아니다. 티파니의 지난해 매출액은 29억 달러로 전년 대비 15% 늘었다. 이처럼 보석시장이 커지는 것은 국민소득 증가와 더불어 명품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구찌, 프라다, 루이비통 같은 명품 의류가 그랬듯이 보석 역시 ‘장롱 보석’에서 ‘패션 보석’으로 생각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국민대 테크노디자인대학원 김승희(금속공예 주얼리학) 교수는 “‘보석의 민주화 시대’에는 금고에 보석을 넣어두거나 상속하는 것이 아닌 보석을 즐기는 사람이 많다”며 “앞으로 체계적인 매출 집계 방식도 도입돼 점차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보석 열풍이 해외 명품 브랜드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는 데 대해 우려 목소리도 나온다. ‘2008 한국국제보석시계전시회’를 기획한 한국무역협회 최경윤 과장은 “귀금속 원자재 값이 두 배 이상 올라 서울 종로 귀금속 상가 등 중소회사들은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다”며 “보석 문화가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양극화 현상부터 해소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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