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상급 브랜드 ‘땡처리’
‘오은환’ 재킷 5만 원, ‘설윤형’ 바지 5만 원, ‘김영주’ 원피스 8만 원….
롯데백화점 본점이 6∼9일 판매할 국내 최정상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이월상품들이다.
평소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옷의 정상 가격은 대개 재킷 80만∼90만 원대, 바지 30만∼50만 원대. 고로 이번에 나온 가격은 거의 ‘땡 처리’ 수준이다. 롯데 측은 “불황으로 디자이너 브랜드의 콧대가 꺾였다”고 했다. 소비자로선 평소 입기 힘들었던 옷을 싸게 살 수 있는 ‘기회’지만, 요즘 국내 디자이너 여성복 브랜드가 처한 위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 ‘할머니’ 옷으로 전락
국내에서 디자이너 브랜드는 ‘디자이너 부티크 브랜드’와 일맥상통한다. 오은환, 설윤형 등 국내 패션 역사를 써 온 쟁쟁한 디자이너들은 그 이름이 곧 브랜드다. 주로 1970, 80년대 고급 부티크(의상실) 형태로 시작해 디자이너가 곧 사장이고, 가족이 동업한다.
그러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는 최근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이들 브랜드의 전년 대비 매출 신장률은 2000년 27.1%였으나 지난해 ―4.1%였다. 지난해 11월엔 디자이너 이원재 씨의 ‘원재 패션’이 부도나 수많은 하청업체가 함께 어려움을 겪었다.
패션업계는 당초 ‘아줌마’ 옷이었던 이 브랜드들이 ‘할머니’ 옷으로 전락한 것을 브랜드 쇠락의 가장 큰 이유로 본다. 브랜드와 고객이 함께 나이 드는 상황에서 젊은 신규 고객이 유입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20년 전 50대가 지금 70대가 돼서 여전히 찾는다 해도 요즘 50대가 외면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요즘 40, 50대는 수입 브랜드를 찾고, 부동산 임대와 금융소득에 의존해 온 60대 이상은 옷을 잘 안 산다”며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영업과 디자인 측면에서 변화하는 시대상을 따라잡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 젊은 디자이너 못 키우는 국내 현실
최근 10년 동안 국내에 새로 생겨 성공한 디자이너 여성복 브랜드는 국내 디자이너 부부 김석원 윤원정 씨의 ‘앤디 앤 뎁’이 거의 유일하다. 한 백화점 바이어는 “돈 없고 역량 있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옷 샘플을 선보여 바이어들이 이를 사는 쇼룸(옷 도매 공간)이 국내에 없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사실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옷은 최고급 원단과 재봉을 자랑하는 100% ‘메이드 인 코리아’다. 거의 모든 제조가 중국과 베트남 등지에서 이뤄지는 영 캐주얼 브랜드 옷보다 확실히 한 차원 위다. 그래서 요즘 디자이너 브랜드가 처한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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