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는 여자의 꿈을 실현시켜 주는 상징적 오브제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보라. 구두는 여자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선사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두는 때로 여자에게 치명적인 유혹을 던진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에서 주인공 카렌은 빨간 구두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벌로 결국 도끼로 두 발을 잘라낸다. 맥시멀리즘(Maximalism·과장주의)이 올해 패션가(街)를 휩쓸고 있다. 구두라고 해서 예외일 리가 없다. 미니멀리즘(Minimalism·절제주의)이 대세였던 지난해에는 구두 앞코가 날카로운 스틸레토(바늘을 뜻하는 프랑스어) 힐이 거리를 장악했다면 올해는 굽이 10cm가 넘고 앞코가 뭉뚝한 킬힐(Kill Hill)이 대세다. 외국에선 킬러 힐(Killer Hill)이라고 한다. ‘사람 잡는 구두’라는 애칭이 붙은 하이힐의 치명적 유혹에 빠져본다. ○ 모델도 쓰러지는 ‘킬힐 바이러스’에 감염되다 지난해 9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프라다의 ‘2009 봄·여름 패션쇼’. 20cm가 넘는 킬힐에 덧버선까지 신고 런웨이에 올라선 모델들은 보기에도 아슬아슬했다. 신인 모델들은 하얗게 얼굴이 질려 보였다. 안쓰러울 정도였다. 걷다가 넘어지는 모델들이 줄을 이었다. 한 모델은 결국 쇼 중에 구두를 벗어들고 워킹을 해야 했다. 베테랑 모델들의 워킹도 곡예를 보는 듯했다.
패션가에서는 높은 힐을 주체하지 못해 모델들이 넘어지는 것을 두고 ‘킬힐 바이러스’라고 한다. 올봄 킬힐 바이러스는 런웨이를 넘어 거리로 전파됐다. 하지만 바이러스 강도는 훨씬 약해졌다. 모델들이 ‘올라 서던’ 킬힐보다는 굽이 10∼14cm로 낮아졌기 때문. 평범한 직장 여성들이 10cm가 넘는 킬힐을 신고 서울 광화문이나 종로 일대 울퉁불퉁한 보도와 횡단보도를 런웨이 위 모델처럼 활보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프라다뿐 아니라 스릴레토 힐로 유명한 구찌, 보수적인 페라가모조차 아슬아슬한 높이의 킬힐을 내놓았다. 레노마, 까메오 등 국내 구두 브랜드도 10cm가 넘는 신상 구두를 속속 선보였다. 혹자는 올해 킬힐이 유행하는 것을 경기와 연관짓는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여성의 구두 굽이 높아진다는 것. 실업에, 물가에 위축된 마음이 반대급부로 굽에 반영된다는 해석이다. 물론 구두라는 소재에서 남녀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시인 송문익은 자신의 시 ‘아내의 구두’에서 “나는 아내의 짝이고 아내의 구두는 내 구두의 짝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직장인 송모 씨(31·여)는 170cm에 이르는 키에도 킬힐을 신는 이유에 대해 “나보다 더 큰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로망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육중한’ 구두가 남성들에게 여성적으로 어필하기는커녕 거부감을 주지 않을까 걱정된다면? ○ 그녀가 내 프러포즈를 받아준다면 “내게 킬힐은 정복의 의미다. 저렇게 불편한 구두를 신는 여자라면 자기관리가 철저할 것이다. 그런 여자가 내 프러포즈를 받아들인다면 묘한 성취감을 느낄 것 같다.”(30세의 싱글남 김모 씨) 킬힐은 수동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있다. 가는 힐로 남성들에게 가녀림을 어필하고 보호본능을 자극하기보다, 걸을 때 불편함을 줄일 수 있도록 힐이 두꺼워지고 앞굽도 높아졌다. 하이힐의 미학적 기능보다 높은 굽으로 누구보다 홀로 잘 걸을 수 있어야 한다는 21세기 여성들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배어 있다. 글=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신는 대신 올라탔다 자신감도 쑥 올랐다
그렇다보니 올해 킬힐에서는 건축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 ‘신는다’는 표현 대신 ‘올라 선다’는 표현이 잘 어울릴 정도로 균형의 미(美)가 더욱 강조됐다. 킬힐은 스스로를 지탱하고 서 있는 건축물과 같은 구조로 인간의 몸을 곧게 지탱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패션은 건축이다”라고 말했던 샤넬 여사처럼 디자이너들은 균형과 미를 과학적으로 조화시킨 건축적인 힐을 잇달아 선보였다. 올해 봄여름 시즌 이브생로랑은 마치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철골구조를 연상케 하는 힐을 선보였다. 킬힐의 둥근 굽은 그리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매끈하고 풍성한 돌기둥을 닮아있다. ○ 마법의 주문을 외우다 사실 모든 ‘쇼퍼홀릭(shopaholic·쇼핑광)’은 다 ‘슈어홀릭(shoeaholic·구두광)’이다. ‘신상녀’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가수 서인영이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새로 막 구입한 구두를 바라보며 “내 아기들∼”이라고 외칠 때 시청자들의 리얼리티 지수는 치솟았다. ‘사치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부인 이멜다 여사는 3000여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슈어홀릭’의 전형을 꼽으라면 단연 미국 TV드라마 ‘섹스앤드더시티’의 캐리(사라 제시카 파커)다. 집세 낼 돈이 없어도 캐리는 이제 막 구입한 신상 구두를 신고 뉴욕 맨해튼 거리를 활보한다. 강도를 만나도 “다른 건 몰라도 마놀로 블라닉(구두 브랜드)만은 안된다”고 외친다. 히피와 저항문화의 여파로 플랫 슈즈가 대세던 1970년대 마놀로 블라닉은 날렵하게 잘빠진 스틸레토 힐 열풍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다. 뾰족한 앞코, 여성의 굴곡을 연상시키는 구두 밑바닥, 아찔하고 가느다란 힐은 과감한 동시에 고급스럽고 우아하다. 그는 하이힐을 통해 여성들에게 마음껏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미적 권리를 줬다. 하지만 정작 아찔한 매력을 보여주는 하이힐이 여성만의 특권으로 자리 잡은 것은 100년도 채 안 된다. 기원전 4세기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의 테베고분 벽화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가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있다. 하이힐의 유행을 이끈 주인공은 절대 권력을 휘두른 ‘태양왕’ 루이 14세였다. 키가 160cm 정도에 불과했던 그는 자신의 키가 커 보일 수 있도록 굽 높은 신발을 즐겨 신었고 귀족들이 따라하는 바람에 널리 퍼졌다. 이후 20세기 들어서 여성들의 굽은 점차 높아지고 가늘어진 반면 남성들의 굽은 낮아지게 됐다.(에두아투르 푹스 ‘풍속의 역사’) 그렇다면 왜 여자들은 구두에 열광할까.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아름다운 구두가 자신을 더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란 믿음 때문일까. 심리학자들은 구두가 자아를 의미한다고 본다.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신발을 벗어놓는 것은 자아를 버리고 간다는 의미다. 마케터로 일하는 직장인 신모 씨(33·여)는 계절별로 30만, 40만 원이 넘는 명품 구두를 사 모은다. 그에게 구두를 사는 일은 자기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일종의 호화로운 의식이다. 신 씨는 “매일 야근에 저런 굽 높은 구두를 신을 일이 당장은 없어도 저 구두를 신고 마케팅 책임자로 멋지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상상을 해본다”고 말했다. ‘오즈의 마법사’의 주인공 도로시는 깜찍한 루비 슬리퍼를 신고 꿈에 그리던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아름다운 구두를 신고 치장한 후 한껏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공과 부에 한걸음 다가서는 모습은 ‘슈어홀릭’의 영원한 로망이다. 마음에 든 구두를 신고 주문을 외우면 마치 꿈이 이뤄질 것처럼. “구두는 여자를 변화시킨다.”(마놀로 블라닉)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 이탈리아 프라다 구두 공장 천연 접착제-수작업… ‘드림 슈즈’ 탄생 비결
지난해 9월 열린 2009 봄여름 밀라노 컬렉션에서 프라다는 뱀피 가죽과 레이스를 화려하게 접목한 킬힐을 선보여 전 세계 패션업계의 이목을 끌었다. 옷에나 달던 레이스를 구두에 과감히 적용한 프라다의 킬힐은 여성스러움을 극대화해 거친 느낌의 다른 럭셔리 브랜드의 그것과는 그 차이가 두드러졌다. 아직 국내에서는 살바토레 페라가모나 구찌처럼 ‘프라다 슈어홀릭’은 많지 않지만 절제의 미(美)로 대변되는 프라다 가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프라다 구두만의 맥시멀리즘(Maximalism·과대 패션)’을 흠모하는 여성들이 점차 늘고 있다. 지난해 9월 밀라노 컬렉션 취재차 찾은 이탈리아에서 국내 언론 처음으로 프라다 구두 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국내 언론뿐 아니라 현지 언론에도 좀처럼 공개되지 않는 곳이었다. 프라다 제품은 모두 이탈리아 현지에서 제작된다. 이탈리아에서도 중부지방인 아치오에 프라다 구두를 비롯해 가방, 의류 공장 3곳이 모여 있다. 아치오는 1년 내내 맑고 온화한 기후 때문에 살기가 좋아 이주 없이 몇 대에 걸쳐 사는 토박이가 많다. 그렇다보니 손으로 세공을 하는 산업이 발전했다. 프라다가 자사의 공장 3곳을 이곳에 세운 이유기도 하다. 아치오는 프라다를 이끄는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의 남편인 파트리지오 베르텔리 프라다 회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아치오에서 레바넬라란 지역에 위치한 프라다 구두공장은 연간 30만 켤레, 하루 2500켤레의 구두를 수작업으로 만드는 주력 생산시설이다. 공장이라는 표현이 어색할 정도로 건물 안팎은 제약회사 연구소 느낌이 물씬 났다. 건물 전체가 유리로 덮여 있고 건물 주변에 대나무를 심어 동양적인 분위기가 묻어났다. 프라다코리아 홍보팀 김주연 대리는 “3년 전 준공된 이 공장의 콘셉트는 ‘친환경’”이라며 “패션회사라 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소요되는 에너지와 자원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태양광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장 안으로 들어가니 올해 봄여름에 선보일 구두 샘플이 가득했다. 크리스털을 슈즈 앞머리에 단 스틸레토 힐부터 런웨이에서 봤던 뱀피 가죽 킬힐까지 여심을 흔드는 ‘드림슈즈’가 미완성된 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막 만들어진 구두에서도 특유의 화학 냄새가 나지 않았다. 김주연 대리는 “화학 접착제 대신 천연 접착제를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디자인실에는 거칠게 스케치된 구두 디자인 도안들이 벽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유명 디자이너들처럼 ‘슥삭슥삭’ 거칠게 그려댄 디자인 초안으로는 바로 생산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영화 속에는 나오지 않는 실무자들이 디자인을 현실화하는 역할을 한다. 수십 년간 제품 생산에서 일했던 숙련공들이 디자이너의 영감을 제품으로 연결시키는 것. 디자이너가 제시한 디자인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 소재를 잘라야 할지, 바느질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현장에서 결정해 또 다른 도안을 만들어 낸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