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 : 다품종-소량생산시대 맞춰 개성있는 한국적 제품으로 승부
金 : 부친의 회사와 철저히 독립… 배송시스템도 독자 운영
내로라하는 국내 패션기업 2세들이 모여 만든 밴드 ‘사오칠회’. 밴드 이름을 듣고 패션계 종사자들인 만큼 패션과 관련된 심오한 뜻이 있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1970년대생인 멤버들의 출생 연도 끝자리를 땄다는 설명을 듣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밴드 멤버들이 서로 알고 지낸 지는 3년이 채 안 됐다. 가업을 이어야 한다는 동병상련과 패션산업에 대한 이들의 열정은 밴드 결성으로 이어졌다. 한세실업 창업자인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의 아들 김석환 아이스타일24 이사(35), 톰보이 창업자 고(故) 최형로 회장의 아들 최정현 톰보이 대표(35), 한섬 정재봉 회장의 아들 정형진 한섬 이사(35), 슈페리어 김귀열 회장의 아들 김대환 와이드홀딩스 대표(34), 쌈지 천호균 대표의 아들 천재용 쌈지마켓 실장(32) 등이 ‘사오칠회’의 멤버다.
다섯 멤버 가운데 김석환 아이스타일24 이사와 천재용 쌈지마켓 실장 등 2명을 18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세실업 본사에서 만났다.
○ 후광은 NO! 실력으로 승부
쌈지 의류사업부인 쌈지마켓을 맡고 있는 천 실장이 기자에게 건넨 명함에는 경기 광주시에 있는 쌈지물류센터 주소가 적혀 있었다. 천 실장은 “의류사업을 하려면 물류부터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 뜻에 따라 지난해 초부터 1년간 물류센터에서 일을 배웠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천 실장은 ‘가업’에는 영 뜻이 없었다. 미국 뉴욕시각예술대에서 미술을 공부한 것도 아버지 회사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는 시도였다. 천 실장은 “하지만 아들로서 쌈지에 힘을 보태야 한다는 부담을 벗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의류사업 외에도 광고기획과 영화사업에도 뛰어들었다. 패션은 단순한 옷이 아니라 문화를 파는 것인 만큼 다양한 장르의 문화와 패션 간의 소통이 그의 주요 관심사다.
김 이사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부는 경영학, 대학원은 컴퓨터공학)에서 공부한 경험을 살려 온라인 쇼핑몰 아이스타일24와 온라인 서점인 예스24의 공연·영화사업부인 ENT24를 맡고 있다. 아이스타일24의 모기업인 한세실업은 한 해 6억 달러(약 7600억 원)어치의 의류를 폴로, 갭, 나이키 등 미국 유수 브랜드에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수출하는 중견 의류회사다.
남들은 부자 아빠를 둔 탓에 탄탄대로가 펼쳐졌다고 하지만 아들이라고 아버지의 성공에 무임승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 이사는 “과연 아버지만큼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은 여전하다”며 “선진 유통기법을 도입해 가업을 좀 더 발전시켜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속도’를 중시하는 젊은층의 니즈에 맞춰 화장품과 옷을 주문한 당일 받아볼 수 있는 배송시스템을 갖춰 틈새시장 공략에도 나섰다. 도서로 배송 노하우를 갖춘 예스24의 도움을 받을 법도 하지만 아버지인 김동녕 회장은 철저히 독립경영을 내세웠다. 김 이사는 “경기 파주시에 있는 물류센터도 예스24와 따로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 패션은 사양산업 아닌 고부가가치산업
아버지대와 달라진 패션 환경도 넘어야 할 큰 과제다. 천 실장은 “패스트 패션(유행을 빠르게 찍어내는 옷)이 가져온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에 맞춰 국내 패션 브랜드들이 얼마나 획일성을 탈피해 저마다 개성을 갖추고 경쟁하느냐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
두 사람은 또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키우는 것이 패션산업 발전의 가장 큰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김 이사는 “패션은 1970, 80년대 반도체 못지않은 높은 부가가치산업이었고 지금도 충분히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산업”이라고 했다.
의류매장에 한글을 접목한 인테리어를 선보이기도 했던 천 실장은 “유명 수입 브랜드의 잠식으로 국내 패션 브랜드가 크게 위축되는 상황에서 한국 패션이 세계로 나아가려면 한국적인 것에 대한 더 구체적인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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