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재단,오늘 국제학술강연회
《3·1운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4월 13일)을 넘어 동아시아 근대사회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세계사적 운동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은 9일 오전 9시 반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의원회의실에서 3·1운동 90주년 기념 국제학술강연회를 열고 세계 근대사에서 3·1운동의 의미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의 세계사적 의미를 조망한다. 김용구 한림대 한림과학원장, 김희곤 안동대 교수(한국근대사), 겅윈즈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연구원, 마쓰오 다카요시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일본근대사), 토머스 녹 미국 서던메소디스트대 교수가 논문을 발표한다.》
○ 근대국가·민주공화제 지향한 임시정부 탄생
김희곤 교수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세계사적 의의’에서 “3·1운동은 한국의 식민지 해방 운동일 뿐 아니라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면서 독립국가의 체제를 군주국가가 아니라 근대민주국가로 지향하게 만든 근대사회 구현 운동이었다”고 말했다.
3·1운동이 한국사 최초로 근대국가와 민주공화제를 달성한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1919년 이후 독립운동의 민주공화제(정치), 자본주의(경제), 합리주의와 비판정신(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친 3·1운동의 역할을 ‘독립운동 근대화론’으로 규정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이 주권의 소유자임을 나타내는 ‘민국’을 명시했다. 김 교수는 특히 임시정부가 한국사 최초의 국민정부였다며 한국처럼 정부조직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인 국가는 세계적으로 프랑스와 폴란드의 망명 정부 외에는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 첫 국민정부’ 臨政수립 도화선
日 일부 지식인 제국주의 반성 계기
○ 日언론 ‘무단정치’ 비판 ‘문화정치’ 환영
마쓰오 다카요시 명예교수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와 3·1독립운동’에서 “3·1운동이 다이쇼데모크라시라는 일본의 정치적 근대주의 운동과 맞물려 조선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이 일거에 높아졌고 일부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일본의 동화정책과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자성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오사카아사히신문이 1913∼1918년 6년간 사설로 조선 문제를 다룬 횟수는 6번에 불과하지만 3·1운동 이후 1919년에만 11번, 1920년에는 8번으로 증가했다.
일본 언론은 3·1운동 이후 일본의 무단통치(군사계엄통치)를 비판했고 같은 해 8월 새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 마코토가 내세운 문화정치를 환영했다.
1919년 일본은 의회 주권의 입헌군주제와 정치적 자유, 보통선거제의 정당선거를 지향한 다이쇼데모크라시가 정점에 이르렀다. 요시노 사쿠조 도쿄제국대 법학부 정치 담당 교수(1878∼1933)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일본의 조선-일본 동화정책을 비판했다. 요시노 교수는 3·1운동 이후 일본에 조선인의 민족심리 존중과 동화정책 포기를 요구하고 일본과 똑같은 언론 자유를 조선에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잡지 ‘동양경제신보’는 “일본이 아무리 선정(善政)을 시행해도 조선인은 독립하기 전까지 반항을 멈추지 않을 것”(1919년 5월 15일자)이며 “일본이 조선의 독립의 시기를 앞당기는 정책을 시행해야 한다”(1919년 8월 5일자)고 보도했다.
○ 중국, 반봉건 신문화 운동에 자극제
겅윈즈 연구원은 ‘중국 근대사와 5·4운동의 역할’에서 “3·1운동은 중국 인민 특히 청년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중국 진보 언론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다.
5·4운동은 중국이 근대 민족 개념을 자각하는 계기이자 중국의 봉건제도와 문화에 반대한 신문화운동의 자극제가 됐다. 즉, 3·1운동이 중국의 근대사회 형성에 영향을 미쳤던 셈이다.
겅 연구원은 “5·4운동으로 촉발된 (근대) 민족주의가 세계주의로 연결돼 국민당은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세계 모든 민족과 연합해야 한다’고 천명했고 신문화운동은 중국의 민족문화 부흥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말했다.
겅 연구원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세계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이 고조되는 가운데 민족 독립과 건국을 목표로 일어난 움직임이었다는 점에서 3·1운동과 5·4운동은 같은 시대적 배경을 가졌다”고 말했다.
○ 1919년은 민족자결 제창한 국제주의의 시발점
20세기 미국 정치외교사 전문가인 토머스 녹 교수는 ‘우드로 윌슨의 국제주의: 과거와 현재(1919∼2009)’에서 윌슨 대통령의 국제주의가 “제국주의,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국가들의 공동체’, 즉 국제연맹의 역할을 강조했다”고 말했다.
녹 교수는 “1919년 윌슨은 미국의 독자적 강제력을 주창한 보수적 국제주의자와 대립했다”며 “1919년 윌슨을 괴롭혔던 문제는 2009년의 우리를 똑같이 괴롭히는 문제들이다. 핵무기 감축, 유엔의 역할, 국제법의 다자간 이행 등 모든 게 윌슨의 국제주의적 시각이 오늘날에도 유효함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한편 김용구 한림과학원장은 ‘베르사유 체제의 역사적 의의와 한반도’에서 “1919년 6월 연합국과 독일이 맺은 강화조약인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한국과 이집트, 인도, 중국 등 제국주의 침탈을 받던 국가들이 ‘잃어버린 민족자결권 회복’의 열망을 표출했다”고 말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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