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도 모르면서 기술윤리 다뤄서야”
“유행처럼 번지는 ‘통섭’ 철저한 학문적 성찰 필요”
최근 학문 간 경계 허물기가 학계의 화두로 등장한 가운데 국내 학자들이 한국 학계의 통합적 학문 연구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23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원장 김세균)이 ‘통합적 학문 연구의 가능성과 전망’을 주제로 여는 학술대회다.
이 자리에서는 국내에서 유행하고 있는 에드워드 윌슨 하버드대 교수(생물학)의 ‘통섭(consilience)’ 개념을 “자연과학적 제국주의”라고 비판하는 이남인 서울대 철학과 교수의 논문과, 자연과학에 무관심한 채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접목을 추구하는 인문학자를 비판하는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의 논문 등 9편의 논문이 나온다.
이 교수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통섭 개념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삼아’라는 논문에서 인문학 및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와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유형의 학문을 아우르면서 통일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윌슨 교수의 ‘보편적 통섭’ 개념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는 “자연과학적 방법을 통해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주제를 연구하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을 자연과학에 포섭시키고자 하는 윌슨 교수의 통섭 프로그램은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부정하는 자연과학적 제국주의 또는 생물학적 제국주의”라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통섭 개념이 유행처럼 번지면서 대학가에서 통섭학과, 통섭대학, 통섭대학원 등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이에 앞서 철저한 학문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학과를 설립하면서 통섭학과라는 명칭을 사용했다고 하자. 이 경우 만일 통섭을 학제적(學際的) 활동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게 되면 이 학과는 자신의 사명을 결코 완수할 수 없을 것이다. 이 학과는 ‘학제적 학과’가 될 것인데 다양한 유형의 학제적 활동을 이 학과 혼자서 감당하는 일은 아예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연구·교육 단위의 명칭에는 통섭보다 기존의 ‘학제적’이라는 개념을 비롯해 그 종개념(하부단위)에 해당하는 ‘융합’ ‘협동’ 등 의미가 분명한 개념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홍 교수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통합 모색: 과학기술학자의 관점에서’라는 논문에서 과학기술 주제를 다루는 인문학자들이 과학기술에 무관심하다고 비판한다. 그는 “(과학)기술 시대 인문학의 역할을 다루는 책을 봐도 기계에 대한 도면 한 장이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고, 특정 기술에 대한 서구의 몇몇 인문학자들의 논의에 기초하거나 이를 반복하는 경우가 많다”며 “인문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기술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규범적인 결론을 너무 쉽게 유도하는데, 이는 엔지니어가 소설이나 철학책을 전혀 읽지 않은 채로 인문학에 대해서 논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 ‘굴절광학’의 서문 격으로 출판된 책이라는 것을 아는 인문학자는 많지 않으며 ‘굴절광학’에서 데카르트가 렌즈 깎는 기계를 선보이면서 그 작동을 설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고 했다.
그는 “인문학자들은 왜 기술이 창의적이고 의미 있는 인간의 활동인지, 기술은 왜 예상치 못한 결과를 항상 낳는지, 기술 디자인에는 왜 정치와 윤리가 각인돼 있는지, 특정 기술이 어떤 사회집단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며 이를 보완할 방법은 무엇인지 등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기존 인문학자들이 이런 기회를 갖지 못했다면 현재 인문학을 배우는 학생들에게라도 기술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기회를 제공해야 ‘테크네(techne·technique의 어원) 인문학’이 출발할 수 있다고 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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