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닭 한 마리로 삼계탕을 끓이면 다리 하나는 아버지의 그릇, 다른 하나는 오빠 그릇에 들어갔다. 다리를 좋아했던 나는 “왜 항상 다리는 아빠랑 오빠가 먹어”라고 물었고 가족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오빠가 “난 살 많은 몸통이 더 좋다”라고 말한 덕에 난 그때부터 다리를 먹을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게 내 페미니즘의 시작이었다.
아버지는 “여자라서 뭘 못 한다고 하지 마라”는 말을 자주 했다. “지은아, 여자라서 지도를 잘 못 본다고 하지 마라” “길을 설명할 때는 동서남북과 미터법을 사용해라” “수학은 사실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니 피하지 마라” 등등.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쩌면 나는 상당한 페미니즘 가정에서 자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부모님의 입에서 나온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단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말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북쪽으로 두 블록 가서 우회전하면 있는 두 번째 건물이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끔 이런 말도 듣는다. “와, 여성분 중에 이렇게 말하는 분 처음 봐요.” 그럴 땐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자이기 때문에 길을 설명하기 힘들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거운 것을 들기 힘들었던 적은 많다. 하지만 내가 여자인 것이 지도를 보거나 미분 적분을 익히는 데 장애가 되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여자아이들의 평균 수학 점수로 쉽게 증명이 된다.
사회에 나와서 다른 가치를 알게 되었다. 이런 말을 종종 들었다. “어우, 니 남자친구는 힘들겠다.” 실제로 남자친구들이 힘들다고 한 건 아니지만 혹시 일어날 일을 미연에 막기 위해 나는 여자아이들과 노하우를 공유했다. 의견을 개진할 때 세 보이지 않는 법 같은 테크닉을 익혔다. 사랑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생각한다. 그 고민을 할 시간에 차라리 내 생각을 더 깊게 만들 걸. 직무수행 능력을 높일 것을.
책을 쓴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 여성이다. 그는 2015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뽑은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이기도 하다. 도발적인 제목처럼 강한 어조의 책일 줄 알았는데 오해였다. 비서구권 여성이 느끼는 삶의 복잡한 층위가 전해졌다. 그도 여성에게 요구되는 노하우를 나이지리아 친구들과 공유했겠지. 현재 한국 사회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하면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서로 덜 불편하기 위한 것, 사람 대 사람으로 더 자연스러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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