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다양한 인생의 교훈을 전한다. 위기를 만나면 불필요한 것은 버려라,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등 바둑의 교훈은 삶의 지침으로도 유용하다. 바둑을 즐기는 사회 각계 명사와 최고경영자(CEO)를 통해 바둑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서 바둑판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기자가 아마 5단임을 밝히자 석 점을 놓는다. ‘무조건 끊고 싸우는 전투형’이란 말과 달리 착실하게 집을 지었으나 중반 실족으로 한 판을 놓치더니 넉 점을 놓고 ‘다시 한판’을 요청한다. 그 대국마저 상수(上手)의 무리수를 남발한 기자의 승리였다. 적절한 치수는 넉 점에서 다섯 점 사이일 듯싶었다.
한국자산신탁과 MDM의 대표인 문주현 회장(58). 두 업체는 부동산 금융과 개발 분야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제 사업이 집을 지어 파는 건데 바둑도 결국 집을 짓는 거죠. 일과 취미가 똑같습니다.”
바둑이 끝난 뒤 그는 영화 ‘신세계’의 배우 황정민처럼 진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며 농을 던졌다.
어릴 적 형과 삼촌이 바둑 두는 걸 보고 어깨너머로 기리(棋理)를 익힌 그는 소위 책보다는 실전을 통해 실력을 키운 야전형 스타일이다. 그의 인생 역정도 비슷했다. 전남 장흥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난 그는 농사를 짓다가 검정고시를 통해 26세 늦은 나이에 경희대 회계학과에 들어갔다. 1987년 나산실업에 입사해 7번 특진하며 30대 최연소 임원이 됐으나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부른 외환위기 때 나산그룹이 부도 나는 바람에 실직자가 됐다. 그러다 1998년 분양 대행업체인 MDM을 세운 뒤 지금까지 4만여 채를 분양시키며 성공 신화를 썼다.
“제 바둑도 그렇게 두지만 ‘분투 중에 쓰러질지언정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항상 가슴에 안고 삽니다. 저는 흙수저도 아닌 손수저로 태어났어요. 흙수저도 없었던 셈이죠. 비관도 많이 했지만 ‘사람과 사람의 승부에서 이겨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둑과 사업은 참 비슷한 대목이 많다”고 했다. 바둑도 맥점 하나로 상황이 역전되듯이 사업에서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 최근 성공작으로 꼽히는 경기 고양시 삼송지구 분양도 쇼핑몰 입주라는 맥점이 놓이면서 미분양의 무덤이라고 하던 곳이 분양 ‘대박’ 장소로 변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대비해 몇 수를 내다보고 둘 수 있다면 바둑도 사업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사업성이 없다고 여겨질 때, 바둑으로 치면 상대의 세력이 강해 자신의 말이 매우 곤궁할 때는 아깝다고 계속 손대지 말고 포기할 줄 아는 과감성도 똑같이 요구된다고 했다.
MDM은 지난해 출범한 여성 바둑리그의 스폰서로 나섰다. 올해는 후원 금액도 2억 원에서 3억 원으로 증액했다.
그는 “양궁 쇼트트랙 탁구처럼 바둑도 한국 여성들의 활약이 뛰어난 종목인데 여성 바둑기사를 위한 무대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워 후원했다”며 “여성 리그가 중국을 뛰어넘는 밑거름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한국기원 이사로도 선임되는 등 바둑계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았다.
“바둑은 체력 부담이 없어 인생 끝까지 갈 수 있는 취미 같아요. 게임과 달리 폭력적이지 않아 가족끼리 함께 할 수 있다는 점도 좋습니다. 저희 형제들은 명절 때 만나면 바둑 한판으로 회포를 풉니다. 조그만 내기를 하며 서로 ‘이기네, 지네’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최근 끝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을 통해 그는 “이 9단이 다른 사람이나 환경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의 실력 부족만 얘기하는 걸 보고 겸손한 자세가 새롭게 다가오더군요.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감과 창의력으로 한 판을 이겨낸 정신력을 높이 사고 싶어요. 이 9단을 예전에도 알고 지냈지만 팬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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