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run, long learn.’ 이의범 회장이 직원에게 늘 강조하며 언급하는 표현이다. 정석(定石)을 배우지 않으면 바둑의 재미를 만끽할 수 없는 것처럼 인생과 사업, 학업 등 모든 분야에서 ‘롱런’하고 싶다면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의미다.
일정이 바쁜 그에게 ‘속기로 두자’고 했다. 선선히 그러자고 하던 그는 막상 승부에 들어가자 뚝딱뚝딱 두지 않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기자의 세력 작전에도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실속을 챙기던 그는 조금 불리한 국면이라고 여기자 계가를 거듭하며 끈질긴 추격전을 펼쳤다. 결과는 기자의 1집 반 승이었지만 그의 집중력과 승부근성에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SG그룹 이의범 회장(53)을 최근 경기 성남시 판교 SG그룹 사옥 집무실에서 만났다. 인터넷 바둑 사이트인 사이버오로에서 기자와 똑같이 6단을 둔다고 해 호선으로 대결을 벌인 것.
이 회장은 SG배 페어바둑 최강전과 BASSO배 직장인 바둑대회를 7년째 후원하고 있고, 여자바둑리그에는 SG골프 팀(박지은 루이나이웨이 9단, 송혜령 강다정 초단)으로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바둑계의 열혈 후원자다.
대전 출신으로 서울대 계산통계학과(82학번)를 졸업한 그는 인수합병을 통해 연 매출 1조3000억 원의 SG그룹을 일궜다. 1991년 생활정보지 ‘가로수’를 창업한 뒤 2000년 상장시켰고 이후 제도샤프 제조업체인 마이크로, 자동차 시트 제조사 KM&I, 의류업체 세계물산, 충남방적, 신성건설 등을 인수했다.
“인수합병은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대우차에 시트를 납품하던 KM&I는 연간 100억 원 이상 적자를 기록하고 강성 노조가 있던 곳이라 모두 인수를 반대했어요. 그러니까 싼값에 나왔겠죠. 하지만 납품가만 정상화한다면 회생 가능하다고 봤어요. 강성 노조도 겉으론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론 이익을 원한다는 속성을 알고 있어 대처할 수 있다고 봤고요. 서두르지 말고 참고 기다리며 따질 것을 다 따지면 인수합병의 승률을 90% 이상으로 올릴 수 있어요. 이 기업을 못 사면 다른 기업을 사면 돼요. 제일 좋아하는 바둑 격언이 가볍게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라는 뜻의 ‘신물경속(愼勿輕速)’이에요.”
앞서 둔 그의 바둑처럼 사업 원칙도 비슷했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이 역시 화제에 올랐다. 그는 내용적으로 배울 게 많다며 10분 이상 조목조목 설명했다. 상대 돌을 잡으려고 덤비지 않는 것, 몇 집 손해 보더라도 선수(先手)를 잡는 것,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는 것 등 기존에 알고 있던 얘기지만 알파고가 다시 한번 확실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바둑에서 상대 돌 하나를 잡으려면 4개의 돌이 필요하잖아요. 알파고는 상대 돌을 잡으려고 하지 않더군요. 비효율적이라고 본 거죠. 사업이나 인생도 남을 꼼짝 못하게 잡으려고 하면 안 돼요.”
그는 바둑을 책으로 배웠다.
“중3 때 고교 평준화가 되며 입시가 없어졌어요. 시간이 남아돌았죠. 헌책방에서 우연히 본 우칭위안(吳淸源)의 일대기가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1930년대 중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기사들을 모조리 물리친 이야기가요. 그의 기보를 이해하고 싶어서 기초 책부터 정석 책을 들입다 외웠어요.”
그는 요즘 지난해 세운 스크린골프 업체 ‘SG골프’에 힘을 쏟고 있다.
“골프존이 국내 시장 75%를 점유한 스크린골프 시장에 왜 뛰어드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해외 시장을 보면 아직 블루오션이죠. 세계 최고의 스크린골프 기술력을 국내에서 썩히고 있어요. 저희가 곧 세계 시장을 겨냥한 비장의 제품을 내놓을 테니까 지켜봐 주세요.”
기자는 그가 보통의 아마추어와는 달리 여러 번 계가하는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죠. 요즘 창의력 교육을 강조하는데, 저는 판단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판단엔 근거가 있어야 하고 바둑에선 그게 계가죠. 그에 따라 작전이 달라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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