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을 하다 보면 더 이상 해당 사업을 진행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인 시간과 돈이 아까워 포기를 못 하다가 더 큰 화를 입을 때가 있는데, 어느 순간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바둑에서도 돌을 잘 버리는 사람이 고수다.
그의 집무실에 들어가자 바둑 대회용 탁자를 볼 수 있었다. 바둑판과 바둑돌을 놓기 좋게 만든 전용 탁자다. 아마 5단 실력인 박동현 메지온 회장(60)은 “시간 날 때 종종 바둑을 두기 때문에 아예 구비해 놨다”고 설명했다.
호선(흑을 잡은 쪽이 덤을 주는 방식)으로 둔 대국에서 박 회장의 막판 착각으로 기자가 승리를 거뒀다. 박 회장은 착각하기 이전으로 돌아가 다시 바둑을 두고 계가까지 해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TV의 바둑 채널을 켜 놓고 자기도 합니다. 꿈속에서라도 바둑 실력을 좀 올릴 수 있게요. 하하.”
바둑 마니아로 꼽히는 박 회장은 2002년 동아제약에서 분사해 메지온을 설립했다. 메지온은 발기부전 치료제인 ‘자이데나’를 북미 지역에 판매하기 위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 절차를 10여 년 전부터 밟아 왔다. 올해가 막바지 단계.
“지금까지 승인 절차를 밟기 위해 100억 원가량 들었습니다. 승인받아도 약을 시중에 퍼뜨리는 데 한 200억∼300억 원 정도 들 겁니다. 바둑으로 치면 두터운 세력을 쌓아놓고 실리로 바꾸는 과정인데 여기서 실수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가 되긴 하죠. 하지만 (승인) 안 될 이유가 없기에 자신 있습니다.”
그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예일대 경제학과와 스탠퍼드대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1985년 미국 메릴린치에 입사한 뒤 잘나가는 금융인으로 성공했다. 별 걱정 없이 돈 잘 벌던 금융인이 왜 신약 개발이라는 지난한 길로 뛰어든 것일까.
“운명의 장난이죠. 하하. 판에 박히고 자극 없는 금융 일이 너무 하기 싫었어요. 지금까지 돈 버는 게 우선인 일을 했으니 이젠 재미있는 게 우선인 일을 해보자 하고 시작한 게 신약 개발입니다. 초보여서 고생 많이 했지만 정말 재미있어 후횐 없어요. 바둑처럼 하면 할수록 어려운데 늘 새롭고 창조적입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와 외삼촌이 대국하는 걸 보며 어깨너머로 바둑을 익혔다. 외삼촌이 풍양 조씨의 장손인데 조남철 9단과 먼 친척이어서 어릴 적에 조 9단을 자주 봤다고 했다. 또 조 9단의 조카인 조치훈 9단과는 지금도 가끔 만날 정도로 인연을 맺고 있다.
미국 유학 때는 바둑 둘 기회가 없었고 귀국 후 다시 바둑을 두며 체계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적엔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다. 바둑은 본능을 건드리는 게임”이라고 말했다. 박준병 전 의원, 김인섭 변호사 등과 호적수인데, 특히 박 전 의원과는 20여 년간 1만 판 이상 뒀다.
그는 신예 기사를 위한 기전인 메지온배 오픈신인왕전을 만들어 올해로 4년째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기원 이사도 맡았다.
“바둑계에 일말의 보탬이라도 되고자 하는, 일종의 자원봉사죠. 한국기원이 재정적으로 자립하도록 만드는 게 제 목표입니다.”
그는 바둑만큼 인생은 물론이고 사업의 지침을 주는 것이 드물다고 했다. 변하지 않는 사업의 원리 중 하나가 ‘모든 게 늘 변한다’는 것.
“환경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모든 사업을 다 성공할 순 없어요. 사업이 10개라면 대략 8개는 실패하고 2개는 성공하는데, 실패할 땐 손해를 최소화하고 성공할 땐 최대한 이득을 보는 게 관건이에요. 바둑도 잘 안 풀릴 때 단숨에 역전시키려고 하다 손해가 커지고, 잘나갈 때 느긋한 마음에 느슨한 수를 두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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