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 퇴임하고 난 뒤에는 오롯이 연극 속에 살고 있어요. 문화적으로 소외받는 지방무대를 찾아가는 문화운동을 더욱 활발히 하고 싶습니다.”
최근 만난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66)의 말이다. 그는 문화행정가로 살아온 8년간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요즘 무대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전석 매진을 이끈 연극 ‘햄릿’에선 생애 여섯 번째 햄릿을 맡았고, 연말에는 자신처럼 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장남 남윤호(33)와 함께 출연한 연극 ‘페리클레스’에서 1인 2역을 맡아 해설자와 늙은 페리클레스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유 전 장관은 “처음 연기를 배울 때부터 철저하게 기본에 집착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후배들에게도 늘 ‘기본기’를 강조해 왔고, 작품 출연이 결정되면 철저한 자기 관리 모드로 들어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과거의 엄청난 실수가 계기가 됐다.
“1980년대 초반이었어요. 젊음을 믿고 공연 전날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고…. 정신을 놓았던 적이 있죠. 헌데, 그 대가가 너무 혹독했습니다. 목이 쉬어서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더군요. 공연이 사흘이나 남았었는데…. 그날 이후 저는 작품을 시작하면 고행의 길을 걸어요.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늘 좋은 컨디션으로 무대에 서자는 철칙을 지켜가고 있죠.”
그는 다시 배우로 돌아온 삶에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아직도 연기하고 싶은 작품이 참 많아요. 셰익스피어의 작품도 아직 할 게 많이 남았고, 최인호 윤대성 오태석 선생의 보석 같은 옛 작품들도 욕심이 나요. 과거 ‘문제적 인간 연산’으로 호흡을 맞춘 이윤택 연출이 사뮈엘 베케트의 ‘엔드게임’도 하자고 제안해 왔어요.”
유 전 장관은 서울 공연 외에도 지방의 문화 소외지역을 찾아 자신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홀스또메르’를 공연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광주지역 연극인들과 함께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이 작품을 공연했고, 전남 목포에 있는 옛 조선내화 폐공장에서 연극 공연을 하기도 했다.
“40년 전에 지어져 다 쓰러져 가는 폐공장이었는데, 극단 유씨어터 단원들과 직접 무대를 만들었어요. 대도시의 좋은 극장보다 그곳에서 한 공연이 더 감동적이었죠. 연극을 생전 처음 봤다는 주민도 만났습니다. 앞으로 소외된 지역을 찾아 생생한 무대예술의 참맛을 보급하는 데 앞장서려고 해요.”
그는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부터 3년간 문체부 장관직을 수행했다. 최근 블랙리스트 파문으로 홍역을 겪고 있는 문체부에 대해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했다.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의혹이 처음 제기됐을 땐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이후 실체가 드러나고, 현장에서 일했던 문체부 실무 공무원들이 많이 희생돼 가슴 아픕니다. 누군가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위에서 내려오는 압력을 견제해줄 사람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사람이 없었다는 게 가장 안타까워요.”
유 전 장관은 새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문화’의 중요성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어려운 때일수록 더 나은 미래를 볼 필요가 있어요. 국정 농단 사태 등의 부작용으로 국가경쟁력의 성장판인 문화 발전이 위축돼선 안 됩니다. 문체부는 인문정신 분야를 담당하는 부처인데, 국민들이 문화를 더 많이 향유할 수 있도록 공무원들이 그 토양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지름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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