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맹자’ 한질 현 시세로 40만∼100만원 거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0월 30일 03시 00분


헌책 중개인 ‘책쾌’

폭마다 책으로 가득 찬 3단 서가를 그린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폭마다 책으로 가득 찬 3단 서가를 그린 병풍.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합강(合綱)’과 같은 판본의 책이라면 경사(經史)와 제자서(諸子書), 잡기(雜記), 소설(小說)을 따지지 말고, 한 책이든 열 책이든 백 책이든 구해오기만 해주시오.”(유만주·흠영·欽英·1784년 11월 9일)

이덕무(1741∼1793)는 생활이 궁핍해지자 ‘맹자’ 한 질을 200전에 팔아 처자식을 먹였다. 그 소식을 들은 유득공은 ‘춘추좌전’으로 술을 사서 이덕무와 함께 마시며 서로의 처지를 위로했다.

책은 책쾌(冊쾌)를 통해 거래했다. 책쾌는 책의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 주는 중개인이다. 서쾌나 책거간꾼으로도 불렸다. 가난하거나 권세를 잃어 망해 가는 집안에서 흘러나온 책을 시세의 반값에 사서 제값에 되팔았다.

종이가 귀해 편지도 빈 공간 없이 쓰던 시절이니 책의 귀하기는 말할 나위가 없다. 단권으로 엮인 ‘대학’이나 ‘중용’도 품질이 아주 좋은 옷감인 상면포 3∼4필을 주어야 살 수 있었다. 이는 2∼3마지기 논의 1년 소출과 맞먹었다. 이덕무가 ‘맹자’ 한 질 값으로 받은 200전(2000푼)은 지금으로 치면 40만∼100만 원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책은 권력을 가진 경화사족(京華士族)들이 먼저 차지했다. 조정에서 받은 책과 연행(燕行)을 통해 수입한 책, 책쾌를 통해 구입한 책들이 그들의 개인 서고에 쌓여 갔다.

책쾌는 고객이 원하는 책이라면 희귀본이나 금서(禁書)라도 구할 수 있는 정보력이 필요했고, 이왕이면 많은 책을 가지고 다닐 수 있어야 했다.

유명한 당대의 책쾌 조신선(曺神仙)은 책의 이름만 대면 저자와 권수, 출간연도와 판본을 줄줄 읊었다. 내용도 모르는 게 없었으며, 어떤 책이 누구로부터 어디로 팔려 갔는지도 알았다고 한다. 조신선은 이름과 사는 곳도 알려지지 않았지만 100세가 넘도록 늙지 않아 신선으로 불렸다고 하니, 아마도 그를 닮은 자손이 책쾌의 업을 이어갔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유만주는 조신선의 단골로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명청대 책을 샀다. ‘사변’은 200푼, ‘패문운부’는 8000푼에 샀으며, ‘정씨전사’와 ‘김씨전서’는 4만 푼에 달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도 1776년과 1800년 두 차례 책쾌 조신선을 만난 적이 있다.

최한기(1803∼1877)는 책쾌가 하도 드나들어 집 문턱이 닳아 없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책을 사는 데 돈을 너무 써서 말년에는 지금의 한국은행 자리에 있던 집을 팔고 성문 밖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18세기 이후 책이 활발하게 수입되고, 조선에서 인쇄된 방각본과 한글 소설도 유행하면서 책쾌의 영업은 크게 융성했다.

영조 때 일어난 명기집략(明紀輯略·중국에서 들여온 책으로 조선 왕을 모독하는 내용이 실림) 회수 사건은 그에 휘말려 죽은 책쾌가 100여 명에 달했다. 얼마나 많은 책쾌가 활동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지식인들의 학문적 성장에는 책쾌의 노고가 있었다.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
#헌책 중개인#책쾌#이덕무#책쾌 조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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