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천의 얼굴로 풍자… 스탠딩 코미디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일 03시 00분


<재담꾼>

조선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 ‘소리하는 모양’.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조선말기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의 그림 ‘소리하는 모양’.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함북간이라는 자가 있다. 피리도 제법 불고 이야기와 광대놀이를 잘했다. 남들의 생김새와 행동을 보기만 하면 바로 흉내 냈는데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또 입을 오므려 각종 피리 소리를 냈는데 소리가 웅장해 몇 리까지 퍼졌다.”―성현, ‘용재총화’에서

조선시대, 풍자를 섞어가며 익살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공연예술인 재담(才談)은 귀천을 떠나 큰 인기를 누렸다. 고담, 덕담, 신소리라고도 했다. 재담꾼은 무대 장치나 분장 없이 천의 얼굴을 연기했고, 그에 더해 구기(口技)로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구기는 온갖 소리를 흉내 내는 기예다. 재담꾼은 조선의 스탠딩 코미디언인 셈이다.

재담꾼의 실력은 외국인도 놀라게 했다. 1883년 12월 조선을 방문한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은 고종의 소개로 화계사에서 재담꾼의 공연을 관람했다. 로웰은 “배우는 단번에 호랑이로 변했다. 으르렁대는 포효는 진짜 호랑이조차 따라가지 못할 만큼 무시무시했다”고 회고했다.

조선 최고 재담꾼으로는 정조 때 활약했던 김중진이 꼽힌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가 몽땅 빠졌던 터라 늘 입을 오물거렸다. 그래서 ‘외무릅’ ‘오물음’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다양한 레퍼토리가 있었는데, 특히 ‘세 선비 소원담’을 잘했다. 재치가 남달라서 즉흥 재담으로 묘미를 살렸다고 한다.

‘청구야담’에는 ‘인색한 양반을 풍자한 오물음은 재담을 잘한다(諷吝客吳物音善諧)’란 이야기가 나온다. 구두쇠로 이름난 ‘종실(宗室·왕실의 인척) 노인’이 오물음(김중진)을 불렀다. 김중진은 그 앞에서 유명 자린고비 이동지가 ‘저승에는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손을 관 밖으로 빼놓으라고 유언했던 이야기를 공연했다. 종실 노인은 깨달은 바가 있었던지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줬다고 한다.

김중진은 관중의 면면, 공연 장소, 분위기에 맞춰 이야기를 펼치면서도 세상을 풍자했고 교훈과 감동을 줬다. 조선 후기 문인 김희령은 ‘소은고(素隱稿)’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사연을 전개했으나 큰 진리를 비유했다”며 그의 이야기 실력을 높이 평가했다. 재담은 일제강점기 박춘재 명창이 우리 전통 소리에 녹여내 ‘재담소리’로 거듭났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스탠딩 코미디언#조선 재담꾼#김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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