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뇌물 안주면 사형수 고통스럽게 난도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9일 03시 00분


망나니-회자수-행형쇄장

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에서 회자로 사형을 집행하는 모습. 내려치려고 하는 사람은 행형쇄장으로 추정된다. 계간미술 제공
김윤보의 ‘형정도첩(刑政圖帖)’에서 회자로 사형을 집행하는 모습. 내려치려고 하는 사람은 행형쇄장으로 추정된다. 계간미술 제공
“우리나라 속어로 회자수(회子手)를 망나니(亡亂)라고 하니, 지극히 싫어하고 천시하는 말이다.”―황현(黃玹·1855∼1910)의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망나니가 큰 칼을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다가 술 한잔 들이켜고 입으로 뿜어 칼날을 적신다. 망나니라는 말은 도깨비라는 뜻의 망량(망량)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난동을 뜻하는 망란(亡亂)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한문으로는 회자수라고 하는데 원래는 ‘회자(회子)’라는 무기를 들고 대장을 호위하는 군인을 말한다. 회자는 ‘삼국지연의’의 관우가 휘두르는 청룡언월도와 비슷한 모양으로 협도(挾刀)라고도 한다. 실전용이 아니라 위엄을 과시하는 의장용이다. 이 회자를 사형 도구로 사용하는 바람에 회자수가 망나니라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죽을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산 사람의 생명을 끊는 것은 차마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 일을 떠맡은 탓인지 망나니는 오히려 더 잔인해졌다. 사형수가 뇌물을 주지 않으면 고통스럽게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윤준(尹浚)이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사형을 앞두고 있는데 망나니가 돈을 요구했다. 윤준은 “돈을 준다고 내가 안 죽겠는가?”라며 거부했다. 화가 난 망나니는 최대한 고통스럽게 그를 죽였다.

지관(地官) 이시복(李時復)은 순조 임금의 능을 잘못 잡았다는 이유로 처형됐는데, 나중에 보니 망나니에게 난도질을 당했다. 뇌물을 주지 않아서다. 사실이 알려지자 망나니는 물론이고 현장에 입회한 의금부 도사와 전옥서 관원도 처벌을 받았다.

망나니의 행패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떼 지어 시장에 나타나 물건을 빼앗고 돈을 갈취했다. 쌀가게에 들어가서 큰 바가지로 쌀을 마구 퍼 갔다. 주인은 감히 막지 못했고 손님은 더럽다며 가 버렸다. 원성이 높아지자 원님이 나섰다. 관아의 돈으로 땅을 사서 그 소출을 망나니에게 주었더니 행패가 사라졌다. 철종조의 기록인 ‘임술록(壬戌錄)’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에는 사형을 집행하는 기관이 여럿이었다. 죄인의 신분과 죄목에 따라 의금부, 형조, 각 지방의 감영과 군영 등이 나누어 집행했다. 그에 따라 집행자도 여럿이었다. 원칙적으로는 군인의 임무였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다.

전옥서의 사형 집행자는 행형쇄장(行刑鎖匠)이라고 했는데, 사형수 내지 중죄인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사형을 면해 주는 대신 형 집행의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평소에는 다른 죄인과 똑같이 감옥에 갇힌 죄수 신세다. 강제는 아니고 자원을 받았다.

그래도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행형쇄장이 형 집행을 거부한 사례도 있다. 처음에는 간신히 설득해서 형을 집행했지만, 두 번째는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요지부동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신세인데도 끝까지 거부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도살업자를 불러 억지로 형을 집행했다. ‘승정원일기’에는 행형쇄장이 죽었으니 후임자를 구해야 한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사형 집행자라는 무거운 책임은 죽어야만 벗어날 수 있었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윤보#형정도첩#회자수#망나니#형행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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