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모기 소리 내며 도적 흉내 몸짓… 팬 몰고다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2월 14일 03시 00분


공연 스타 해금연주자

해금 연주자의 모습이 담긴 20세기 초반의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해금 연주자의 모습이 담긴 20세기 초반의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강원도 회양에 사는 금순채는 해금에 뛰어나 금선(琴仙)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0대부터 연주를 시작해 일흔 살까지 현역으로 활동했다. 금강산을 유람하는 사람들은 경치 좋은 곳에서 연주를 감상하고 싶은 마음에 그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덕분에 그는 금강산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강준흠의 ‘삼명시집(三溟詩集)’에서

해금은 원래 중국 랴오허강 상류에 사는 해족(奚族)의 악기다. 고려시대에 우리나라로 전해졌다. 왕실과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해금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중화됐다. 문학과 예술의 여러 분야에서 상품화 현상이 나타난 시기다. 악기 연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김성기(1674∼1720)처럼 현악기, 관악기, 노래, 작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멀티 아티스트 유형의 천재 음악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단일 악기로는 해금 연주자에 대한 기록이 유독 많다.

해금 연주자들은 모기가 앵앵거리는 소리, 장인들이 뚝딱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등을 해금으로 흉내 냈다. 다양한 몸짓도 곁들였다. 배가 아파 크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나 남한산성 도적이 이리저리 달아나는 흉내를 냈고, 다람쥐가 장독 밑으로 들어갔다고 외치기도 했다. 이들은 풍자와 해학을 소리와 접목시켰다.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시인 조수삼은 이를 두고 ‘사람을 깨우치는 말’이라 했다.

적지 않은 인기도 모았다. 공연을 하면 사람들이 겹겹이 둘러쌌고, 공연이 끝나 돌아갈 때면 따라오는 이들이 수십 명이었으니 스타라 부를 만했다. 하루 벌이도 ‘곡식 한 말과 돈 한 움큼’이었으니 상당한 편이었다. 부유층 연회에 불려간 연주자는 더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가장 유명했던 해금 연주가 유우춘(1776∼1800)은 수입 고민이 컸다고 전해진다. 유우춘은 원래 용호영에 근무하는 하급 무관. 그 역시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해금 연주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노모를 봉양해야 하는 절실함과 박봉이 동기가 됐다.

그는 다섯 손가락에 못이 박일 정도로 실력을 갈고닦았다. 3년 만에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가 됐다. 그러나 살림살이는 크게 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예술성을 좇을 것인가, 대중성을 추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유우춘이 고관대작들 앞에서 연주하며 곁눈질로 살짝 보면 많은 사람들이 졸고 있었다. 자기가 연주하고 자기 혼자 듣다 오는 꼴이었다. 요취곡(군악 계통의 곡조)과 영산회상의 변주곡을 연주하면 귀공자들은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좋다. 좋아!” 하고 외쳤다. 유우춘은 속으로 그들을 비웃었다. 하지만 음악성을 추구하자니 수입이 줄어들 판이었다. 반대로 대중성을 추구하면 미천하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돈과 예술 사이에서 갈등했던 직업 연주자의 고민은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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