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소리를 보는 맹인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9일 03시 00분


조선시대의 맹인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점을 보고 경전을 외우는 판수가 되거나 침과 뜸을 놓으며 생계를 이었다. 악기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에 민감해지기 때문이었다. 맹인 연주자를 관현맹(管絃盲)이라고 한다.

관현맹은 궁중 행사에서 음악을 연주하거나 기생의 가무에 반주를 맡았던 음악인이다. 여자 악공만으로 필요한 악기를 제대로 연주하기가 곤란했기 때문에 남자 맹인 악사들을 동원했던 것이다.

세종 때는 음악을 관장하는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선발한 맹인 18인에게 음악을 익히게 하였다. 이들은 궁중음악인 당악(唐樂)과 우리 고유의 음악인 향악(鄕樂)의 전공으로 나뉘어 퉁소, 피리, 가야금, 거문고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경국대전’에는 장악원(掌樂院)에 4명의 관현맹이 소속되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그보다 많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폐지되었다가, 효종 때 다시 시행되어 궁중 연회에서 13인의 관현맹이 급료를 받으며 연주를 했다.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면서 조선 말까지 존속되었는데, 흉년이나 국상(國喪)을 당하면 수입이 줄어 지극히 가난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뛰어난 악공이 많이 배출되었다. 성종 때 살았던 이마지(李知)는 거문고를 잘 탔는데, 김안로(金安老)는 그의 연주를 듣고 극찬했다. “구름이 떠가는 듯 냇물이 솟구쳐 흐르는 듯하고, 소리가 그칠 듯하다 이어지고, 활짝 열렸다가 덜컥 닫히고, 유창하였다가 처절해졌다. 그 변화에 황홀해진 좌중은 술잔을 드는 것도 잊고 나무토막처럼 멍하니 얼이 빠져 있었다.”

율곡 이이(李珥)도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관현맹 김운란을 만나 아쟁 연주를 듣고 지은 시가 있다. “빈 누각에 아쟁 소리 들려오자, 오싹하니 좌중이 조용해지네. 아쟁의 현이 손을 따라 말을 하고, 세찬 냇물 깊은 곳에서 흐느끼네. 늦여름 매미가 이슬 젖은 잎에 매달려 있고, 작은 샘에서 물이 솟네. 귀를 기울이니 구름 속에 있는 듯이, 여운이 오래도록 다하지 않는구나.” 이처럼 장애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며 살아간 관현맹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
#조선시대#맹인#관현맹#궁중음악#악공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