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49> 백성의 법률대리인 ‘외지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15일 03시 00분


“외지부라 불리는 자들은 항상 관아 근처에 있다가 원고나 피고를 몰래 사주합니다. 또 이들은 스스로 송사를 대신하며 시시비비를 어지럽게 만들어 관리를 현혹하고 판결을 어렵게 합니다. 해당 관부에 명하시어 조사해 처벌하소서!” ―성종 3년 12월 1일, 성종실록

조선은 양반뿐 아니라 노비나 여성도 거리낌 없이 소송을 제기했다. 옥에 갇힌 죄수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법을 몰라도, 글을 쓰지 못해도 소송은 가능했다. 법률 전문가 ‘외지부’ 덕분이었다.

외지부는 고려 도관지부(都官知部)에서 유래했다. 도관(都官)은 법률을 관장하는 형부 소속 관청, 지부(知部)는 판결을 맡은 종3품 관리를 일컬었다. 외지부는 도관 밖, 민간에서 지부 노릇을 하는 자를 뜻했다. 소장을 대신 써주고 소송을 조언했던 외지부는 요즘 말로 하면 ‘야매 변호사’였다.

조선은 귀천을 떠나 백성이 자유롭게 소장을 제출하도록 배려했다. 18세기 편찬된 목민서 ‘치군요결(治君要訣)’은 소장 제출을 어렵게 하는 아전을 처벌하도록 적고 있다. 그러나 백성에게 관아 문턱은 여전히 높았다. 소송을 제기하려면 법전에 근거해 소장을 한문으로 써야 했기 때문이다.

또 한문에 능숙하다고 소장을 제대로 쓰는 것도 아니었다. 소장은 공문서인 만큼 서식과 내용을 구비해야 제 기능을 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법조문을 모르는 마을 훈장이 소장을 쓰면, 증거는 빼놓고 감정에 호소하는 문장만 늘어놓는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외지부는 법률 지식과 문서 작성 능력을 토대로 법에 무지한 이들을 도왔다. 소장을 대신 썼고, 소송이 진행되면 자문도 맡았다. 조선시대 소송은 세 차례 진행되었고 두 차례 승소해야 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또 판결에 불복하면 상급기관에 재심을 요청했다. 외지부는 긴 소송 과정에서 의뢰인을 보호했고, 법률대리인 역할도 함께했다.

명종 때 역참 소속 노비 엇동은 양반의 부당한 추노(推奴)에 맞서 소송을 제기했다. 선조 때 다물사리는 자신과 자식까지 사유재산으로 만들려던 양반 이지도에 맞서 자신은 나라에 속한 성균관 공노비라며 소송했다. 엇동과 다물사리는 글을 모를뿐더러 법률 지식도 없었다. 외지부가 있었기에, 힘없던 두 사람은 양반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외지부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법률 지식을 이용해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조정 입장에서 외지부는 백성을 꼬드겨 소송을 벌이며 법을 이용해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이었다. 연산군은 외지부 16명을 함경도로 유배 보내기도 했다. 또 중종 때 편찬한 법전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은 외지부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외지부는 사라지지 않았다. 법은 모르나 법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많은 백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지부는 법과 글을 모르는 조선 백성의 변호사였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외지부#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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