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종이 처음 들어왔을 때, 동래 사람들이 왜인에게 태엽 감는 법을 배워 서울에 전했다. 그러나 자세하지 않아 시계가 있어도 쓸 줄 몰랐다.(중략) 내 숙부 이민철이 조용한 곳에 자명종을 들고 가 시계 축 도는 것을 응시하고는 나사를 모두 뽑아 분해했다. 보던 이들이 모두 경악했으나 이내 조립해 이전처럼 완성했다.” ―이이명의 ‘소재집(疎齋集)’
1631년 명나라에 갔던 정두원은 포르투갈 예수회 선교사 호드리게스를 만났다. 정두원은 그를 통해 서양 화포, 자명종, 망원경, 서양 과학서를 사왔다. 인조는 서양 화포를 구입한 공을 기려 상을 내리려 했으나 조정 신료는 반대했다. 정두원이 구입한 물건 가운데 쓸모없는 게 많다는 이유였다. 그들이 보기에 자명종은 ‘예쁜 쓰레기’였다.
자명종은 서양 과학기술의 정수였으나 조선에서는 골동품처럼 집안 한구석을 장식하는 비싼 소품이었다. 조선과 서양의 시간 체계가 달랐고, 무엇보다 톱니바퀴 수십 개로 작동하는 기계였던 까닭에 작동 및 수리 방법을 몰랐다.
정두원이 자명종을 사온 지 30여 년이 흐르자 조선에서 ‘시계 제작자’가 나타났다. 이들은 자명종을 분해, 조립하며 기계 작동 원리를 스스로 깨쳤다. 또 일본인이 거주하던 왜관을 드나들며 자명종 제작 기술 일부를 익혔다. 이 당시 조선의 시계 제작자는 자명종 부품을 이용해 새로운 시계를 제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669년 이민철과 송이영은 수입 자명종을 분해해 그 부품을 가지고 ‘혼천시계’를 제작했다. 두 사람은 전통 천문관측기계 ‘혼천의(渾天儀)’에 최신 서양 시계기술을 접목했다. 서양 시계는 1657년 ‘시계추’를 발명하며 크게 발전했는데, 혼천시계는 두 개의 시계추로 작동했다. 시계추를 발명한 지 불과 13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시계 제작자 가운데 이민철 최천약 나경적이 유명했다. 이이명은 소재집에서 이민철이 자명종을 분해했던 일을 적으며 지켜보던 이들 모두 경악했다고 썼다. 이민철의 나이 아홉 살 무렵의 일이었다. 아홉 살 꼬마가 자명종을 분해 조립했던 것이다. 17세기 당시 자명종은 60냥, 서울 초가집 전셋값은 40냥이었다. 보는 이들이 경악했던 까닭이다.
이규상은 명사 인물지인 ‘병세재언록’을 썼다. 이 책에 따르면 조선 최초의 시계 제작자는 최천약이었다. 최천약은 영조의 자명종을 수리해 이름을 떨쳤다. 최천약은 영조가 내놓은 자명종을 수리했을 뿐 아니라 똑같은 자명종까지 만들어 바쳤다. 기술이 정묘해 최약천을 두고 마술사라는 소문도 퍼졌다.
나경적은 홍대용을 도와 혼천시계를 제작했다. 홍대용은 사설 천문대인 ‘농수각(籠水閣)’을 짓고 나경적을 초빙해 혼천시계를 제작했다. 혼천시계는 시간에 맞춰 자동으로 행성의 위치를 보여줬다. 나경적의 시계 제작기술과 홍대용의 천문지식이 합쳐져 농수각은 최첨단 천문대로 거듭났다.
조선의 시계 제작자는 정밀한 기계를 다루는 공학자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무에서 유를 일궈낸 시대의 천재들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시계 제작자는 천대 속에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은 19세기까지 바늘 하나 만들지 못하는 나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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