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55>19세기 말 전국 보부상이 25만명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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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권용정의 보부상 그림.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권용정의 보부상 그림.
새우젓 사려 조개젓 사려, 초봄에 담은 쌀새우는 세하젓이요, 이월 오사리는 오젓이요, 오뉴월에 담은 젓은 육젓이요, 갈에 담은 젓은 추젓이요, 겨울 산새우는 동백젓이오.―보부상의 새우젓 타령

담바고를 사시오 담바고, 평양에는 일초요, 강원도라 영월초요, 평안 성천의 서초요, 입맛 나는 대로 들여가시오.―보부상의 담바고 타령


조선시대, 이리저리 떠돌며 물건을 팔아 살아가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보부상(褓負商)이다. 보부상은 봇짐장수 보상(褓商)과 등짐장수 부상(負商)을 합친 말이다. 보상은 비단, 금은으로 만든 세공품, 필묵, 피혁과 같은 고가품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다녔고, 부상은 생선, 소금, 나무제품, 토기 등 비교적 저렴하고 부피가 큰 물건을 지게에 지고 다녔다. 도로가 발달되지 않아 상품의 유통이 어렵던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았고, 5일장이 생겨난 뒤로는 장날에 맞추어 순회하는 장돌뱅이가 되었다. 매매알선과 금융, 숙박업 등을 하던 객주(客主)에 소속되어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이 뚜렷한 시대에 사람대접을 받기 어려운 직업이었던 데다 자본도 없었기에 더욱 천시를 받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동료를 모으고 계(契)를 맺어 끈끈한 조직을 이루었다. 보부상단은 읍내에 가게를 차리고 보부상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였다. 장터가 서면 흥정꾼을 고용하기도 했다.

부상과 보상은 각각의 상단(商團)으로 나뉘어 있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구분하여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상단은 군현을 묶은 관할마다 임소(任所)를 두고 그 우두머리인 본방(本房)을 선출하여 사무를 맡았다. 또한 본방 중에서 접장(接長)을, 접장 중에서 도접장(都接長)을 선출해 8도를 대표하는 전국적인 조직을 이뤘다. 이들은 이름과 취급 상품, 거주지 등이 적힌 신분증을 발급했고 세금도 납부했다. 혼자는 약하지만 조직을 이루면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탐관오리나 폭력배들의 횡포에 공동으로 대항했다. 탄탄한 조직력 덕에 역사의 주요 장면에 등장한다.

상부상조 정신으로 똘똘 뭉친 보부상은 어려움을 당하면 서로 도왔고, 성실히 일하되 같은 소속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다. 객지에서 병이 들어 고생하거나 객사(客死)한 보부상을 보면 일면식이 없어도 돕거나 땅에 묻어주었다. 특히 조직을 위협하고 상도덕을 어지럽히는 행위를 엄금하여, 규칙을 위반하면 곤장을 맞고 벌금을 내야 했다. 사건마다 각각 달라 적게는 10대에서 최대 50대를 맞았다. 본방어른을 속이면 40대, 부모에게 불효하거나 형제와 다투면 50대의 가장 엄한 처분을 받았다. 혼인이나 장례에 내는 부조의 품목과 수량도 따로 정해져 있을 정도로 계산이 정확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헤어질 때는 저고리를 바꿔 입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보부상들은 몸에 맞는 옷을 입은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1894년경 전국의 보부상 수는 25만 명 정도로 추산됐다. 이후 길이 잘 닦이고 유통이 발달하면서 보부상은 점점 사라져갔다.

김동건 동국대 동국역경원 연구원
#보부상#보상#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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