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61〉불가능을 연기한 환술사와 차력사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7일 03시 00분


신서고악도, 신라악 입호무 (한국전통연희사전, 민속원, 2014)
신서고악도, 신라악 입호무 (한국전통연희사전, 민속원, 2014)
“주머니를 열고는 더듬어 보게 하였으므로 손을 넣어 더듬었더니 동전 다섯 닢만 있었는데 조금 있다가 맨손으로 그 주머니를 열고 움켜 낸 동전이 쉰 닢에 가까웠습니다. 그 돈을 다시 거두어 주머니에 넣게 한 뒤 사람을 시켜 다시 더듬게 했더니 또 다섯 닢만 있었습니다.” ―영조실록 39년 1월 30일

12세기 일본에서 출간된 ‘신서고악도(信西古樂圖)’는 당나라 시절 유행한 공연을 기록한 책이다. 신라 공연도 나온다. 신라 것으로 나오는 ‘입호무(入壺舞)’는 항아리에 들어가 추는 춤이다. 탁자 두 개, 항아리도 두 개를 놓고 무희가 이쪽 탁자 위 항아리로 들어가 저쪽 탁자 위 항아리로 나온다. 요즘 마술사가 선뵈는 공간이동 마술의 원조다.

조선은 마술을 환술, 마술공연을 환희, 마술사를 환술사라 일컬었다. 환술사는 여러 장치나 숙달된 손놀림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눈앞에 선뵈었다. 환희는 진귀한 공연이었으나, 남을 속이고 놀래는 기예라는 통념 때문에 유학자는 좋지 않게 여겼다. 홍문관 부제학 이맹현은 성종이 중국 사신을 따라온 환술사의 환희를 즐기자 보지 말라고 상소했다. 허균의 형 허봉은 연행을 가 환술 공연을 보고 부정적 인상을 받았다.

16세기 실존인물 전우치도 유명한 환술사였다. 조선후기 문인 홍만종은 전우치를 도사로 꼽아 ‘해동이적’에 실었지만 ‘어우야담’을 남긴 유몽인은 전우치를 진짜 도사에 미치지 못하는 환술사로 여겼다. 어우야담 속 전우치는 도구 없이 밧줄을 세워 하늘나라 복숭아를 따왔고 밥알을 불어 나비를 만들어 날렸다. 밧줄을 타고 올라갔던 아이가 땅에 떨어지자 사지를 다시 맞춰 걷게 하는 환술도 선뵈었다.

부정적 통념 때문에 많은 환술사가 음지로 숨어들었다. 음지로 숨어든 환술사는 환술을 써 사기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조선후기 문인 서유영의 ‘금계필담’에 나오는 환술사는 거지꼴을 하고 다녔으나 환술을 써 진탕 먹고 마셨다. ‘금계필담’ 속 거지 환술사는 기방에 들어와 소매에서 돈을 줄줄이 꺼냈다. 또 환술사는 최면술을 써 기생을 희롱하고 떠났다. 거지 환술사 입장에서 본다면 환희를 보여주고 그 값으로 공짜 술을 뺏어 먹은 셈이었다.

환술은 부정적 인식 아래서도 공연으로 정착한다. 남사당패 공연에서 각 연희 선임자를 ‘뜬쇠’라 부르는데, 14명 내외의 뜬쇠 가운데 ‘얼른쇠’가 있다. 환술사다. 얼른쇠가 펼친 환희는 ‘금계필담’ 속 거지 환술사, ‘어우야담’ 속 전우치가 부렸던 환술과 비슷했을 것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눈앞에 선뵈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환술사와 차력사는 닮은꼴이었다. 차력사 역시 환술사처럼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공연했다. 조수삼은 ‘추재기이’에서 ‘돌 깨는 사람’을 기록했다. 석공이 아니라 차력사였다. 이 차력사는 구경꾼이 모여들기를 기다렸다가 웬만큼 모였다 싶으면 차돌을 깼다. 단단한 차돌을 맨손으로 깼으나 단 한 번도 실패가 없었다.

환술사와 차력사는 사람을 놀라게 했고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들었다. 조선은 예의와 범절을 중시하는 엄숙한 나라였다. 엄숙한 세상에서 백성은 환술사와 차력사 덕분에 가끔 왁자지껄 놀라고 웃을 수 있었다.

홍현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신서고악도#입호무#환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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