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rrative Report]‘수포자’였던 세민이의 대입 10회말 역전홈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2일 03시 00분


《 꿈과 행복은 당연히 잘 어울리는 한 쌍. 초중고교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에게 이 두 낱말과 잘 어울리는 또 다른 단어들을 고르라면 그중 하나는 아마 서울대일 것이다. 이렇게 꿈, 행복, 서울대를 한 묶음으로 만들고 나면 야구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서울대 입학이 아니라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오는 게 꿈이었다. 그 꿈을 이뤄 행복하다”고 말하는 두 청년이 있다. 서울대 야구부 역사에서 입학도 하기 전에 먼저 부원이 된 건 김세민(20·체육교육학), 구본원 씨(19·경영학)가 처음이다. 지난해 서울대 수시모집 전형 자기소개서 양식에 맞춰 이들의 서울대 야구부 입부기를 소개한다. 》  
서울대 입학보다 서울대 야구부 입부를 꿈꿨던 학생들이 있다.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더욱 채찍질한 이들은 서울대 
야구부 사상 처음으로 입학 전에 부원이 되며 꿈을 이뤘다. 창단 후 공식전 승리가 단 1승밖에 없는 서울대 야구부 유니폼을 입은 
김세민 씨(왼쪽)와 구본원 씨가 손으로 공을 쥐어 보였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서울대 입학보다 서울대 야구부 입부를 꿈꿨던 학생들이 있다.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더욱 채찍질한 이들은 서울대 야구부 사상 처음으로 입학 전에 부원이 되며 꿈을 이뤘다. 창단 후 공식전 승리가 단 1승밖에 없는 서울대 야구부 유니폼을 입은 김세민 씨(왼쪽)와 구본원 씨가 손으로 공을 쥐어 보였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 고등학교 재학 기간 중 학업에 기울인 노력과 학습 경험에 대해,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1000자 이내)  

저 김세민은 중학교 졸업 때 수학 성적이 수우미양가 중 가였습니다. 하지만 고3과 재수 시절에는 모두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수학 1등급을 받았습니다. 전환점이 된 건 고1 겨울방학. 그 겨울 저는 서울대 야구부를 알게 됐습니다.

그전까지는 야구에만 미쳐 있었습니다. 잘 때도 리틀야구팀 유니폼을 벗지 않을 만큼 야구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프로 선수가 되기엔 실력이 모자란다고 생각해 활동을 그만뒀습니다. 그 대신 신도림중과 장훈고에 진학해 제일 먼저 야구 동아리부터 만들었습니다.

공부는 늘 뒷전이던 제게 서울대 야구부 정석 코치님은 구세주가 돼 주셨습니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에서 뛰기도 했던 정 코치님은 저희 어머니와 골프 모임을 함께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 “아들이 야구에 미쳤다”고 하소연하시자 “그러면 서울대 야구부나 한번 구경 시켜 주자”고 제안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열흘간 제주도 전지훈련을 따라갔습니다. 제주도에서 제일 놀란 건 형들이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연습이 끝나고 PC방에 가려고 했는데 형들이 계속 “세민아, ‘수학의 정석’ 풀자”고 하는 겁니다.

제주도에서 돌아오는 길에 형들에게 “꼭 정식 부원이 돼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솔직히 서울대는 자신 없었습니다. 그래도 형들의 조언을 따라 단기 목표를 세워 하나씩 하나씩 목표를 채워갔더니 어느덧 수학 문제가 풀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덕수고 야구부 출신 이정호 형(21)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더욱 서울대에 대한 갈망이 커졌습니다. 저 형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수 생활 때는 정호 형이 매니저 누나를 통해 만나고 싶다고 알려와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2. 고등학교 재학 기간 중 본인이 의미를 두고 노력했던 교내 활동을 배우고 느낀 점을 중심으로 3개 이내로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단, 교외 활동 중 학교장의 허락을 받고 참여한 활동은 포함됩니다.(1500자 이내)  

저 구본원은 정호 형 합격 소식이 엄청난 자극제가 됐습니다. 그때 내신 성적이 상위 4.5% 수준으로 떨어져 애를 먹을 때였는데 형 합격 소식을 들은 뒤 상위 0.15%로 점수를 회복했던 생각이 납니다.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가려면 일단 서울대 합격증부터 받아야 했으니까요.

아, 잘난 척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고교 시절 경영·경제학 지식을 야구 산업에 적용한 논문 세 편을 썼습니다. 주제는 각각 ‘동호회 야구 인프라’ ‘야구 용품 유통·판매 산업의 시장 내·외적 문제’ ‘프로야구 관련 산업 인프라의 발전 현황’이었습니다.

이 중 두 번째 논문은 제가 국내에서 최초로 연구했다고 합니다. 저는 논문 초고에 대해 전문적인 평가를 받고 싶어 한국야구위원회(KBO) 구본능 총재께 원고를 보냈습니다. 마침 성함이 제 이름과 비슷해 더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구 총재께서 이 논문을 보셨는지 장덕선 KBO 육성팀장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2013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 초대를 받아 장 팀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광환 서울대 야구부 감독께서 KBO 육성위원장이시더군요.

사실 저는 프로 팀에서 운영하는 유소년 팀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을 만큼 어릴 때 야구를 잘했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하는 게 오히려 독이 됐습니다. 야구 안 시켜주면 자살하겠다고 소란도 피워봤지만 결국 부모님의 반대를 물리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 야구부가 제게 특별합니다. 공부만 했던 학생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으로 야구를 하는 팀이니까요.

저는 앞으로 ‘지속 가능한 야구 인프라’를 조성하는 데 앞장서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중국처럼 야구 기반이 없는 국가로 진출해 한국의 ‘나이키’를 만드는 경영인이 되고 싶습니다.  
3. 학교생활 중 배려, 나눔, 협력, 갈등 관리 등을 실천한 사례를 들고, 그 과정을 통해 배우고 느낀 점을 기술해 주시기 바랍니다.(1000자 이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내가 꿈을 이루면 나는 다시 누군가의 꿈이 된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전문 야구부원에서 서울대생이 된 저 이정호가 두 친구에게 그런 존재가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를 두고 ‘우상’이라고 말하는 이가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지난해 야구부원들한테 세민이가 저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듣고 기분이 묘했습니다. 약속을 잡고 재수 학원 앞에서 같이 저녁을 먹는데 “체력 관리 잘해라”는 말 말고는 딱히 조언이라는 걸 할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야구부 생활에 대해 그냥 얘기를 해줬을 뿐인데 합격하고 나서 ‘정서적인 지지’가 됐다며 참 고마워하더라고요. 제 얘기를 듣고 정말 서울대 야구부에 들어오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했다고. 그 뒤로 카카오톡으로 야구부 생활에 대해 물어 오기에 계속 답해주면서 친해졌습니다.

사실 고등학교에 전교 260등으로 입학해 4등으로 졸업한 친구라니까 남다른 구석이 있는 건 틀림없는 일이겠죠. 아, 2012년 1월 1일에 마지막으로 PC방에 가서 8시간 동안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그 뒤로 딱 끊었다고 하니 독하긴 독한 친구입니다. 저는 원래 컴퓨터 게임을 하지 않다가 요즘 재미를 들여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저 서울대생들과 어울려 봤다는 것만으로 누구에게나 동기부여가 되는 건 아닐 테고, 그 마음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본원이도 야구를 조금만 더 멀리했다면 더 쉽게 서울대에 들어왔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제가 이 친구들에게 희망의 증거가 됐다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스스로 간혹 건방져졌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앞으로 더욱 겸손하게 더 많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비밀이지만 제 꿈 역시 현재진행형이니 말입니다.  
4. 고등학교 재학 기간 또는 최근 3년간 읽었던 책 중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을 3권 이내로 선정하고 그 이유를 기술하여 주십시오.  
▽에밀 쿠에 ‘자기 암시-인생을 변화시키는 긍정적 상상’

운동과 공부를 병행했던 제게는 동기부여가 제일 중요했습니다. 이 책은 ‘나는 날마다 모든 면에서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문구를 무의식 깊은 곳에 새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틈이 날 때마다 저 말을 반복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모든 면에서’를 특히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이 공부와 운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이정호)

▽에릭 브론슨 외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 야구 좀 아는 사람들을 위한 유쾌한 철학서’


1회초∼9회말 18개 챕터로 나뉜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도 제가 살아가는 데 큰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운동선수와 철학자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실패와 대면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편안한 환상이 사라지고 불완전함이라는 우리의 현실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나면, 초점은 경쟁과 대화를 통해 자신을 시험하고 향상시키려는 것으로 옮겨간다. 헌신적인 선수에게 야구는 게임이라기보다는 삶의 방식이다. 오랜 세월을 훈련하고 시험받고 발전하는 데 바치겠다는 약조이다.”(김세민)

▽이영훈 ‘한국의 야구 경제학’


‘한국 프로야구단은 매년 적자로 골머리를 앓는데 어떻게 미국 구단들은 선수들에게 연봉을 퍼주는 걸까?’ 수년간 야구산업을 공부해 온 저였지만 친구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한국과 미국 프로야구 팀의 연간 매출액 차이와 선수 연봉 차이가 경영 목표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를 통해 한계생산(Marginal Product) 등 어려운 경제학 개념을 실제 선수 연봉 고과 산정 방식에 적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구본원)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수포자#대입#역전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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