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숨이 턱 막히게 하는 말. 후배를 이해하려는 의지라고는 없는 꽉 막힌 부장이 했을 법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의 주인공은 20대 여성. 얼마 전 종영한 KBS 드라마 ‘라디오 로맨스’에서 진태리(유라 역)가 후배에게 쏘아붙인 대사다. 극 중 진태리는 28세이다.
선생님, 아버지, 간부급 상사 등 기성세대로 향했던 ‘꼰대’ 딱지 붙이기의 대상이 젊어지고 있다. 꼰대는 자신의 생각이 무조건 옳다며 간섭과 지적, 충고를 일삼으면서 권위와 서열을 강조하는 기성세대를 비꼰 표현. 최근에는 이런 행태를 답습하는 2030세대는 물론 청소년에게도 ‘꼰대’ 딱지가 붙을 만큼 평균 연령이 낮아지고 있다. 이들을 가리켜 ‘젊꼰(젊은 꼰대)’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다.
‘젊꼰’에 대한 비판은 잇따라 불거진 재벌 3, 4세의 갑질 논란이나 올해 초부터 확산된 미투 운동과 맥이 닿아 있다는 분석(아거 작가 ‘꼰대의 발견’)이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고, 아무에게나 막말과 무례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꼰대 의식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3일 구글 트렌드 분석에 따르면 ‘젊은 꼰대’라는 키워드는 올해 3월부터 검색 빈도가 급증해 지난해 대비 3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런 흐름을 반영한 콘텐츠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시청률 30%를 넘긴 KBS 주말드라마 ‘같이 살래요’의 최문식(김권)은 젊꼰의 대표선수다. 스물일곱에 팀장 자리에 올라 부하 직원에게 “넌 평생 내 밑에 있을 테니 시키는 대로 해”라며 막말을 쏟아붓는다. 올해 영화로도 제작된 웹툰 ‘치즈 인 더 트랩’의 김상철도 마찬가지. “후배가 선배한테 먼저 인사해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는 “난 멋진 선배”라며 자평한다. 순끼 작가는 “어디에나 한 명씩은 꼭 있을 법한 인물”이라 평했다.
젊꼰을 비판하는 책도 속속 출간되고 있다. 새내기 복장을 단속하는 대학 선배, 한두 해 먼저 입사한 걸 벼슬로 아는 회사원 등을 꼬집으며 “꼰대에는 나이도 성별도 없다”고 일갈한 ‘꼰대 김철수’(허밍버드)는 기폭제가 됐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블랙피쉬)를 출간한 사회학자 오찬호 씨는 “꼰대를 만나지 않고 한국에서 살기란 어렵다. 이들은 꼰대를 혐오하면서도 본인이 꼰대인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꼬집었다.
일상에서도 젊꼰에 대한 비판은 거세지고 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근무 중인 간호사 김동은(가명·25·여) 씨는 양치질을 하던 중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선배보다 먼저 입을 헹구었다가 버릇없다는 지적을 받은 경험을 털어놓았다. 김 씨는 “수간호사 등 고참 간호사보다 1, 2년 위인 선배의 꼰대질이 더 심하다”며 “진료 차트로 머리를 때리거나 쿡쿡 찌르는 건 기본”이라고 한탄했다.
대학가에서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중심으로 꼰대 선배의 만행을 꼬집는 일이 확산되고 있다. “17학번 대학생이 ‘요즘 18학번들이 선배에게 기어오른다’며 한숨을 내쉬었다”는 식이다.
이러다 보니 젊꼰으로 낙인찍힐까 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젊은 세대도 적지 않다. 초등학교 교사 박준혁(가명·28) 씨는 “꼰대 소리를 들을까 봐 당연히 나눠서 해야 할 일인데도 선뜻 후배에게 맡기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고 말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2030세대에게 개인의 권리의식이 강해지면서 과거에는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던 행동도 ‘꼰대질’이라 여기게 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며 “주류사회로 편입해 살아남기 위해 기성세대의 위계질서를 그대로 답습하는 데 대한 비판”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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