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서울 마포구 한 VR(가상현실) 체험관이 10여 명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VR 전용 헤드셋을 낀 이들은 연신 기관총 방아쇠를 당겼다. 주춤주춤 긴장한 몸짓이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가상현실 세계에선 얘기가 달라진다.
불빛 하나 없는 지하철에서 좀비들이 돌진한다. 팔, 다리가 잘려 피가 쏟아져 나오지만 좀비들은 거침이 없다. 갑자기 튀어나오는 좀비 때문에 생기는 안전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방마다 직원들이 배치될 정도. 중간에 낙오자가 생기는 일도 잦다.
매주 이곳을 찾는다는 대학생 이명진 씨(26)는 “공포영화 보는 것보다 훨씬 낫다”며 “1인칭 슈팅 게임(FPS) ‘마니아’인데 좀비가 나오는 게임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실제로 체험관에서 제공하는 5개 VR 게임 가운데 좀비 소재 게임이 가장 인기가 많다. 업체를 운영하는 이준섭 이트라이브 본부장은 “좀비라는 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최근 예약이 폭주한다”고 전했다.
요즘 한국은 좀비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일부 마니아만 찾던 컬트적인 소재인 좀비가 최근 국내 스크린과 안방극장을 넘어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확산되고 있다. 해외와 차별화해 “한국형 좀비”를 일컫는 ‘K좀비’라는 신조어도 생길 정도다.
본격적인 계기는 영화였다. 1100만 명 관객을 돌파한 영화 ‘부산행’(2016년)의 흥행이 컸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을 만들 때만 해도 좀비는 대중적인 소재가 아니었다”며 “거부감이 만만치 않아 좀비 대신 ‘감염자’로 홍보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원래 해외에서도 좀비 소재는 저예산 공포 영화의 B급 장르로 취급받아 왔다. 시초는 조지 로메로 감독의 1968년 작 ‘살아있는 시체의 밤’. 하지만 2010년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 시리즈와 2억 달러(약 2259억 원)의 제작비를 투입한 좀비 블록버스터 영화 ‘월드워Z’(2013년)가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하며 메인 장르로 발돋움했다.
지난달 25일 공개한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킹덤’은 본격적인 ‘K좀비’ 시대를 알린 작품이다. 조선시대가 배경인 이 드라마에서 탐관오리의 횡포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역병에 걸려 좀비가 된다. 특히 좀비 소재에 당대 시대상을 결합한 시도가 신선했다는 의견이 많다. 곤룡포 등을 입고 빠르게 뛰는 좀비의 모습은 기존 서구의 것과 차별화됐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할리우드 좀비물이 다소 주춤한 상황에서 기대 이상의 슬리퍼히트작이 탄생했다”고 평했다.
13일 개봉한 영화 ‘기묘한 가족’은 좀비에 코미디를 결합했다. 좀비 바이러스는 회춘의 비결이고, ‘쫑비’란 애칭을 얻은 좀비는 양배추에 케첩을 뿌려먹는 채식주의자. 엉뚱한 설정이지만, “좀비물의 새 장르를 개척했다(?)”는 관객 평도 나온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속편 ‘반도’나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준비 중인 ‘여의도’ 등 당분간 좀비 소재 영화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주동근 작가의 좀비 웹툰 ‘지금 우리 학교는’은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이재규 감독을 만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
좀비 ‘콜라보’도 확장되고 있다. 지난해 말 걸그룹 ‘라붐’은 타이틀 곡 ‘불을 켜(Turn It On)’ 뮤직비디오에 좀비를 등장시켜 스산한 앨범 콘셉트를 강화했다. 피 칠갑을 한 대형 좀비 피규어 등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좀비테마 술집도 인기. 이사배 등 인기 유튜버의 좀비 특수효과 분장 영상이나 좀비 분장 후 타인을 놀라게 하는 몰래카메라 영상도 인기를 끌고 있다.
좀비물이 국내에서 이렇게 반응이 뜨거운 이유는 뭘까. 지난해 발간한 ‘좀비 사회학’에서 일본 문예평론가 후지타 나오야는 “좀비를 대중의 무의식과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표상”이라고 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좀비물이 B급 소재에서 현대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 장치로 쓰이고 있다”며 “단순한 재미, 놀 거리를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어 한동안 좀비 열풍이 지속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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