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후 7시 30분 서울 용산구 한남동의 한 사무실. 주말의 시작을 알리는 시간이었지만 서로 얼굴을 모르는 30대 직장인 5명이 모였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사회자가 정적을 깼다.
“최근 여러분이 느낀 감정이 적힌 카드를 골라 볼까요.”
‘짜증나는’ ‘서운한’ ‘안도감’ ‘행복’ 등 50여 개의 감정이 표현돼 있는 다양한 카드를 저마다 꺼내들었다. 모임에 참여한 기자 역시 ‘답답한’ ‘화남’ ‘홀가분한’ 등의 카드를 선택했다.
“도무지 맞지 않는 상사와의 갈등 끝에 회사를 그만뒀죠. 하지만 지금은 가족들만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원망스럽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수가 없네요.”
“‘망했어’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입에서 사라지질 않아요. 원래 꿈꿨던 목표가 계속 수정되고, 아이를 낳은 지금은 새로운 도전이 가능할까 걱정이 돼요.”
시간이 조금씩 흐르자 각자의 속마음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마음속 느껴지는 감정이 있지만 정작 어떻게 표현하고, 풀어내야 할지 모르고 있던 것. 한 참가자는 울컥하며 직장생활의 고충을 털어놨고, 다른 이들은 “나 역시 그랬다”며 위로와 공감의 말을 건넸다. 3시간여의 시간이 흘렀다. 기자를 포함한 참가자 5명은 홀가분한 얼굴로 문을 나섰다.
이 모임을 만든 이남희 스트레스 컴퍼니 대표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제대로 풀지 못해 늘 답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2013년부터 감정 제어와 해소를 돕는 모임과 굿즈를 판매하는 회사를 설립했다”며 “특히 올해 들어 참가자들이 늘고 있는데, 스트레스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2030 직장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최근 쉽사리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감정 표현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화가 쌓이면 병이 나는 법. 응축된 감정을 대신 풀어주는 상품, 서비스, 대중문화 콘텐츠들 역시 덩달아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감정 대리 사회’다.
이 같은 현상은 ‘카카오톡’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메신저 프로그램에서 말 대신 이모티콘으로 대화하는 모습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4일 카카오에 따르면 2012년 4억 건에 불과했던 월간 이모티콘 발송량은 2013년 12억 건, 2015년 20억 건으로 증가했고 지난해에는 무려 22억 건에 달했다.
카카오 관계자는 “5, 6년 전만 하더라도 잘 그려진 이모티콘이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에는 정교하진 않지만 기쁨, 슬픔 등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이모티콘이 각광받고 있다”며 “이모티콘으로 감정을 대신 전달하는 경우가 증가하다 보니 메시지 전달력, 표현력 등이 주요 심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대신 상사 욕해주는 페이지’ ‘대신 찌질한 페이지’ 등 감정 대행 사이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사연을 소개하거나 대표적인 스트레스 사례 등을 익살스럽게 표현하는 글을 게시하는 방식으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의 구독자를 자랑한다. 출판계와 가요계에서는 감정 상태에 맞는 책과 음악을 소개해주는 ‘큐레이션’ 서비스를 속속 내놓고 있다.
김지호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기감정의 적절한 발산법을 익혀 나가지 못한 현대인이 증가하면서 감정 대리 관련 산업 역시 인기를 끄는 것”이라며 “하지만 이 같은 상품과 서비스 역시 근본적으로 감정 조절을 해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스로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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