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렇게 책을 망가뜨리고선 양심도 없지….” 새로 문을 연 서점형 복합 문화공간에서 톡톡 튀는 큐레이션과 개성 있는 생활용품을 구경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직장인 김현경 씨(36)는 최근 불쾌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 남성이 모서리를 접어가며 책을 읽더니 책장 맨 아래에 넣어두고선 유유히 사라진 것. 김 씨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조심히 보는 편인데 판매하는 책을 훼손하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며 “그런 책을 다른 이들이 구입하면 누가 책임질지 의문이다”고 했다.》
○ 서점, 다목적 쉼터가 되다
책만 사고파는 서점은 이제 구시대 유물이 됐다. 거의 모든 대형 서점이 먹고 마시고 쇼핑하다가 쉬어가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도서 정가제 시행과 온라인 서점의 등장으로 위기에 몰린 오프라인 서점이 자구책으로 ‘카페화’와 ‘도서관화’를 택했기 때문이다.
최근 광고회사 이노션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생성된 서점 관련 검색어를 분석한 결과 서점을 문화공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서점에서 휴가를 즐기는 ‘서캉스’(서점+바캉스) ‘책캉스’(책+바캉스) 문화도 자리 잡았다.
지난해 11월 문을 연 서울 중구 ‘아크앤북’이 대표적이다. 일본 쓰타야 서점을 본뜬 공간으로 최근 ‘핫’한 카페와 식당이 다수 입점해 있다. 주중엔 직장인들의 틈새 휴식 공간으로, 주말에는 가족 나들이 명소로 인기가 높다.
하지만 서점의 변화로 인한 문제도 적지 않다. 출판계의 주된 불만은 책 훼손이다. 2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의 한 대형 서점. 한 20대 남성이 서점 내 카페에서 여행책 대여섯 권을 펼친 채 페이지마다 사진을 찍고 있었다. 책을 쌓아두고 꾹꾹 눌러가며 읽는 이들도 보였다.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대형 서점 풍경도 비슷했다. 기다란 테이블 옆에 에티켓 지침을 담은 표지판을 세워 뒀지만 수험서를 쌓아두고 공부하는 이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서가에서도 책을 휙휙 넘기거나 구겨가며 읽는 이가 많았다. 한 서점 관계자는 “시험 기간의 도서관처럼 자리다툼도 종종 벌어진다”고 귀띔했다.
○ “책, 소중히 다뤄야”
출판계는 훼손된 책으로 인한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서점에 책을 보낸 뒤 판매되지 않은 책은 모두 되돌려 받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출판사의 주연선 대표는 “훼손된 채로 반품되는 책이 계속 늘고 있다. 독자들이 서점에서 책을 살펴보는 것은 좋지만 음식을 먹으면서까지 책을 읽도록 허용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카페를 겸한 독립서점의 사정도 비슷하다. 서울 강남구 ‘최인아책방’의 최인아 대표는 “커피를 시켰으니 책을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손님이 많은데, 한 시간씩 새 책을 보면 그 책은 다른 사람이 구입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며 “책 훼손을 줄이기 위해 구입한 책만 읽을 수 있는 공간을 따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서울 양천구 ‘새벽감성1집’의 김지선 대표는 “엄연히 판매용 새 책인데 카페에 진열된 책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아 초반에 스트레스가 컸다. 손님들의 인식이 성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불공정한 데다 책을 홀대하는 서점의 방침도 도마에 올랐다. 한 1인 출판사 대표는 “대형 서점의 공간 상당 부분이 카페, 생활용품점 등 다른 사업을 위한 공간이 돼 버렸다”며 “책을 다른 제품 판매를 위한 일종의 ‘미끼’로 사용하는 듯해 불쾌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서점 측이 견본 책을 비치하도록 제도적으로 못 박는 것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이에 대해 한 대형 서점 관계자는 “팔리지 않은 책은 출판사에 되돌려 주는데, 그 가운데 손때가 묻은 책이 더러 섞인다. 그런 부분까지 일일이 걸러낼 수는 없다. 출판사에서 반품을 거부하는 경우 책을 구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책을 대하는 자세를 비롯해 도서 문화 전반을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도서관과 서점은 엄연히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서점업계는 물론이고 시민들도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소중히 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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