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전남 순천 모 종합병원에서 노모 응급의학과 과장이 응급실 환자 박모 씨(57)에게 막무가내로 구타를 당했다. 노 과장은 “환자가 다짜고짜 ‘날 아느냐’며 물어 ‘모른다’고 하니 갑자기 뺨을 때렸다”며 “나중에 환자 차트를 보니 2년 전 응급실에서 난동을 부려 경찰에 신고한 기록이 있었다”고 했다. 2년 만에 보복폭행이 일어난 것이다.
매 맞는 의사가 해마다 늘고 있다. 2016년 560건에서 지난해 893건으로 껑충 뛰었다. 올해는 상반기에만 500여 건에 달한다. 병원 내 폭행은 대부분 경찰에 신고하기 전 합의하는 경우가 많아 드러나지 않은 폭행 사건은 이보다 3, 4배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의사들이 얼마나 ‘묻지마 폭행과 폭언’에 시달리는지 직접 체험하기 위해 의사인 본보 의학전문기자가 응급실 근무를 지원했다. 서울 관악구 H+양지병원 응급실에서다. 17, 18일 이틀간 오후 9시부터 다음 날 오전 2시까지 근무했다. 이 병원 주변엔 유흥가가 많아 술에 취해 다친 환자들이 응급실에 몰린다. 이들에 의한 의료진 폭행과 폭언, 기물 파손은 매달 5∼10건 발생한다.
○ 주말 응급실은 ‘분노의 도가니’
오후 11시까지는 비교적 한산한 응급실이 밤 12시를 넘기자 20병상 가득 환자가 찼다. 환자 3명 중 한 명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 대부분 정신을 잃은 채 119로 실려 왔다. 이 중 이모 씨(28)는 노래방에서 동료가 내리친 마이크에 머리가 2∼3cm가량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기자가 치료를 권하자 그는 “크게 다치지 않았는데 치료할 필요 없다. 담배 피우러 가겠다”며 막무가내로 응급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계속 말리다가는 소란이 더 커질 것 같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유모 씨(27)는 친구와 소주 2병을 나눠 마신 뒤 갑자기 화가 난다며 술집 유리창을 내려쳐 손을 크게 다친 채 응급실을 찾았다. 이 경우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해 치료비가 두 배 정도 비싸진다는 병원 측 설명을 듣고는 분을 삭이지 못해 식식대며 계속 병동을 돌아다녔다.
술을 마시다 갑자기 얼굴에 두드러기가 나 응급실을 찾은 배모 씨(61)는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며 고함을 질렀다. 오토바이가 넘어져 머리가 살짝 찢어진 김모 씨(19·여)도 “왜 빨리 치료를 해주지 않느냐”며 불만을 나타냈다.
대부분 응급실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는 기다림을 참지 못해서다. 하지만 이는 응급실 체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 응급실은 은행처럼 오는 순서대로 진료하지 않는다. 위급한 1단계 환자부터 상태를 지켜만 보면 되는 5단계 환자까지 내부적으로 분류해 진료 순서를 정한다.
○ ‘친절한 안내’가 부족한 것도 문제
응급실을 찾은 환자는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알지 못해 불안감이 크다. 이럴 때 의료진이 환자의 얘기를 들어주거나 간단한 요구 사항을 해결해주면 환자는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응급실 내 의료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환자를 차분히 돌봐주지 못한다. 박상후 H+양지병원 홍보팀장은 “응급실 환자들은 대기시간에 불만이 많다. 진료 안내 서비스를 전담하는 인력이 있다면 응급실 내 문제를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병원은 사설 경비원 4명을 두고 있다. 하지만 야간 근무 인원은 한 명이다. 출입관리와 순찰 업무를 하기에도 버거운 상황에서 술에 취한 환자를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민간 병원에도 청원경찰을 의무 배치하자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전국 500여 개 응급의료센터에 청원경찰을 배치하려면 2000∼3000여 명이 추가로 필요해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 때문에 의료계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인근 경찰서나 파출소와 핫라인으로 연결된 비상벨을 설치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정성균 대한의사협회 대변인은 “응급의료 관리료를 신설해 국가가 경비원 비용을 지원해 주는 방법이 있다”며 “하지만 병원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경찰이 바로 출동해야 사태를 조기에 수습할 수 있는 만큼 경찰과의 핫라인이 훨씬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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