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주위 시선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홀로 벌이는 중력과의 싸움. 온몸의 경련을 느끼면서도 넘어지지 않으려 애썼다. 스텝을 계속 바꿔도 쉼 없이 흔들리는 무게중심. 머리로는 알겠는데, 팔과 다리는 영화 ‘그래비티’ 속 궤도를 이탈한 우주선이었다.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연습실 거울 속의 나. 뻣뻣한 몸이 원망스러웠다.
서울시무용단이 봄 정기공연을 약 100일 앞두고 본격적인 연습에 돌입했다. 무대 위 무용수의 우아한 동작은 언제나 찬사의 대상. 하지만 무대에 오르기까지 누구보다 격렬하게 땀을 흘리는 노력은 간과되곤 한다. 무용이 뭔지 ‘티끌’ 정도라도 맛볼 수 있다면. 25일 기자는 호기롭게 ‘일일 단원’으로 참여해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연습 1시간 전. 벌써 단원들은 검은색 연습복을 입고 스트레칭에 분주했다. 근데 왜 하나같이 검은색 옷을 입는 걸까. 어벙한 질문에 단원들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몸이 가장 슬림해 보이잖아요.”
오전 10시, 몸 풀기 수업인 ‘최현 기본’으로 연습이 시작됐다. 전통무용 대가인 최현 선생의 전통 춤 움직임을 응용해 만든 수업이란다. 이 과정을 도입한 정혜진 서울시무용단장은 “현대무용이 위로 솟는 느낌이라면, 한국무용은 중력에 따라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이라며 “둘을 융합해야 다채로운 안무와 작품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음악 없이 가볍게”라더니, 몸 풀다 영혼이 빠져나갈 뻔했다. 5분도 안 돼 엄지발가락부터 경련이 일어났다. 쓰지 않던 신체 근육을 혹사한 탓일까. 괜히 미열도 났다. 뭣보다 쉬어가는 타이밍인 줄 알았던 ‘찰나의 정지 동작’이 죽을 맛이었다.
30분쯤 쭈뼛거렸을까. 갑자기 정 단장이 “이제 자진모리로 가자”고 외쳤다. 머릿속에서 꽹과리가 울리며 불안감이 엄습했다. 역시나. 미친 장단을 따라 돌고 또 돌았다. 어지럼증을 느끼며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라는 후회가 위장을 타고 오르기 직전, 음악이 멈췄다. 한 단원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벼운’ 몸 풀기는 끝났어요.”
이후 김성훈 안무가 지도 아래 본격적인 팀별, 개인별 안무 연습이 진행됐다. 솔직히 털어놓으면, 체험은커녕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동작인가 싶은 고난도 자세가 쏟아졌다. 김 안무가는 “무용은 몸으로 말하는 언어이니, 그게 한국어든 영어든 독창적인 외계어를 표현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뭔 소린지 못 알아듣는 자신이 고마웠다.
그렇게 오후 5시까지 단원들은 쉼 없이 달렸다. 그러고도 몇몇은 오후 9시에도 연습을 멈출 줄 몰랐다. 눈길을 끄는 건 먹고 마시는 양. 쉬는 시간이면 정수기 앞에서 물을 몸에 쏟아 넣었다. 초콜릿도 자주 먹고, 식사량도 엄청 많았다. “끊임없이 수분, 당분, 에너지 보충을 안 하면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서울시무용단은 지난달 정 단장이 새로 부임한 뒤 “새 옷으로 갈아입는 작업”이 한창이다. 3월까지 대본 및 캐스팅 작업을 마치고, 새로 활용할 안무를 짠다. 4월부터 공연 안무를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인다. 빡빡한 일정이지만 모든 단원이 한마음으로 뭉쳤다.
연습 도중 여성, 남성 단원이 나뉘어 춤추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정 단장은 “남녀의 거리감으로 ‘미투 운동’을 표현해 봤다”고 귀띔했다. 동작 하나에도 현실적 고민을 담는 과정이리라. 하지만 솔직히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알 수 있었을까. 정 단장은 “설명 없이도 관객이 이해하도록 하는 게 바로 무용수들의 몫”이라 답했다. ‘창작무용의 산실’이라 불려온 서울시무용단의 하루는 그렇게 뜨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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