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베스트셀러]1981년 종합베스트셀러 8위(교보문고 기준)
◇김수영 전집/김수영 지음/310쪽·8000원(당시 가격)·민음사
1981년에 출간된 ‘김수영 전집’이 내 손 안에 들어온 것은 1989년 가을이었다. 아버지가 생일선물로 책상에 뒀던 장면이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출간한 해에 아버지가 사서 읽으시다가 물려주신 시집이었다. 빨간 인지가 붙은 마지막 페이지에는 “영원한 학생, 사랑하는 큰딸에게―아빠”라는 아버지 글씨가 빛바랜 채로 박혀 있다.
가끔씩 김수영을 다시 꺼내 읽을 때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책이 이 시집이라는 사실에 복잡한 마음이 일어난다. 왜냐하면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사물과 사물의 생리와/사물의 수량과 한도와/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시 ‘공자의 생활난’에서) 같은 구절에 아버지가 그어놓은 밑줄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1945년에 발표됐다. 이 해는 25세였던 김수영이 해방을 겪고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을 결심하고서, ‘예술부락’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해였다. 스물다섯 살 젊은 나이지만, 김수영이 자기 생애의 절반 이상을 이미 살아낸 나이였다.
1981년, 광화문 한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코너 앞에 서서 책 한 권을 고르던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지구 최후의 날’(고도우 벤) 같은 지구 종말을 예언하는 책들이 서점가를 휩쓸던 해였다. 그때, 아버지는 김영태 시인의 인물화가 새겨진 김수영 전집에 하필이면 손을 뻗는다. 그리고 표지를 열어본다.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다”로 시작하는, 문학평론가 김현의 문장이 날개에 적혀 있다. 아버지는 이 책을 사기로 결정한다. 훗날 자식이 어른으로 성장하면 물려주게 될 것을 이미 예감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 집에 오게 된 이 책이 아버지의 손에서 넘어와 나의 소유가 되던 1989년에 나는, 이미 시인이 되겠다며 밤이고 낮이고 시만 생각하던 대학 졸업반이었다. 이 책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두 번 정도의 개정판이 출간됐다. 초판본은 21년 뒤인 2002년에 27쇄까지를 펴내고 절판됐다.
1980년은 계간 ‘문학과지성’과 ‘창작과비평’이 언론 통폐합 조치로 강제 폐간되던 해였다. 1975년에 창비에서 출간됐던 ‘신동엽 전집’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판매 금지됐던 전례를 상상해보자면, 그 당시 문학 출판계의 패기가 문득 준열하게 다가온다. 이 기획엔 김수영을 기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간절했던 동기가 있었으리라. 김수영의 준열한 정신을 당시의 암울했던 환경 속에 씨앗처럼 심어두는 것.
김수영이 기염을 내뿜고 작품 활동의 절정을 치닫던 67년에 발표한 ‘사랑의 변주곡’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배울 거다/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할 거다!” 지금은 “그렇게 먼 날”에 이미 당도해 있는 듯도 하다. 그가 만약 지켜보고 있다면, 서슬 퍼런 그의 눈망울에 맺힌 이 시대는 어떤 씨의 발아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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