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의 남쪽을 양이라 하고[산남왈양], 또 물의 북쪽을 양이라 한다[水北曰陽]. 효공(孝公) 때부터 진(秦)나라가 도성으로 삼은 땅은 구종산(九N山) 남쪽이요 위수(渭水) 북쪽이라, 둘 모두[咸]가 양(陽)이 된다 해서 함양(咸陽)이라 불리었다.
시황제 30년 초가을. 그 함양성 동쪽으로 위수의 물을 끌어들이는 엄청난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성곽을 따라 깊고 넓은 물길을 파고 거기 물을 대 해자(垓字)로 삼기 위해서였다. 뒷날의 일이지만, 그 해자에는 난지(蘭池)란 고운 이름이 붙여지게 된다.
천하 서른여섯 군(郡)에서 끌려온 수만 명의 일꾼들이 이제 막 모습을 갖춰가고 있는 물길 바닥과 양쪽 둑을 뒤덮다시피 하여 마무리를 서두르고 있었다. 위수가 얼기 전에 물을 끌어들일 수 있게 하라는 시황제의 엄명 때문이었다. 일꾼들도 해를 넘기기 전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흙을 파는 사람, 돌을 깨는 사람, 파고 깬 것들을 실어내고 나르는 사람, 그리고 물이 굽이치게 될 모퉁이에 축대를 쌓는 사람-일꾼들은 저마다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나라 병사들은 그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면서 구실만 있으면 채찍이나 창대를 휘둘러댔다. 기한을 맞추라는 윗사람들의 재촉 때문이기도 했지만 승리자 혹은 정복자의 가학(加虐)심리도 한몫을 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함양성 동문에서 머지않은 곳의 한 일터는 달랐다. 사수군(泗水郡) 패현(沛縣)에서 끌려온 일꾼들이 맡은 지역인데, 그들은 성곽을 따라 길게 파헤쳐진 물길을 몇 마장 잘라 자신들만의 영역이라도 확보한 것 같았다. 진나라 병사들은 별로 보이지 않는데도 차분하고도 흐트러짐 없이 일하는 게 주변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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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보면 그들은 각기 일을 나누어 받아 제 할 일만 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한발 떨어져서 보면 그들은 무언가를 중심 삼아 그걸 에워싸듯 일하고 있었다. 바로 패현에서도 특히 풍읍(豊邑)과 그 인근 마을에서 끌려온 사람들이 몰려 일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살피면 풍읍 쪽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또 그들 나름의 중심이 있었다. 저마다 맡은 일에 바쁜 척하면서도 그들 한가운데 감춰주듯 에워싸고 있는 세 사람이 그랬다. 물길 바닥에 박힌 커다란 바위를 깨고 있는 이들이었는데, 하나같이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데가 있었다.
그들 셋 가운데 반은 벗은 몸을 땀으로 번질거리며 묵직한 쇠망치를 휘두르고 있는 사내는 키부터가 남보다 머리통 하나만큼은 더 컸다. 거기다가 우람한 몸피에 철사 같은 힘줄로 얽힌 굵은 팔다리라 한눈에 힘깨나 쓰는 장사임을 알아볼 만했다. 얼굴마저 험상궂어 근처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동향(同鄕)의 일꾼들도 공연히 주눅들어하는 표정들이었다.
바위틈에 정(釘)을 대고 망치질을 기다리는 사내도 예사내기 같지가 않았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아도 다부진 몸매나 날카로운 눈빛이 벌써 농촌에서 끌려온 무지렁뱅이 일꾼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사방을 살피는 품이 신분을 감추고 있는 관리나 무언가를 위해 숨어든 첩자 같은 느낌까지 주었다.
하지만 그 둘보다 더욱 사람의 눈길을 끄는 것은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뻣뻣이 서서 다른 두 사람이 땀을 쏟으며 일하는 걸 멀거니 내려다보고만 있는 사내였다. 희고 부드러워 뵈는 살색이나 후리후리한 키도 그런 막일 판에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얼굴 생김은 더욱 그랬다. 시원하게 튀어나온 이마에 우뚝 솟은 콧날, 그리고 검고 긴 콧수염과 풍성한 구레나룻이 어울려 독특한 인상을 지어내었다. 어딘가 용의 머리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어 뒷날 ‘용안(龍顔)’이란 말이 생겨나게 만든 얼굴이었다. 거기다가 어깨 위에는 환하고 넉넉한 빛 같은 것이 떠돌아 그런 그의 모습에 이채(異彩)를 더했다.
별난 것은 그 세 사람의 생김만이 아니었다. 하는 짓이 또 곁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일꾼들과 너무 달라 그들을 남의 눈에 띄게 했다. 셋은 나이도 비슷해 보일 뿐더러, 같은 지방에서 끌려온 일꾼들이고, 방금 하고 있는 일도 분명 셋이서 함께 하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그 중 두 사람만 번갈아 정과 망치를 휘두르며 땀흘리고 있을 뿐, 나머지 하나는 처음부터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멀뚱히 서서 두 사람이 일하는 걸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더욱 알 수 없는 일은 그렇게 빈둥거리고 있는 사내였다. 그에게는 땀 흘리는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거나 멋쩍어 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자신은 그 따위 하찮고 천한 일과는 애초부터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처럼 뒷짐을 진 채 구경만 하다가, 이따금 두 사람이 일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싱긋 웃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무언가 송구스럽고 불편해 하는 것은 땀흘리며 일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 중에서 정을 든 사내에게는 빈둥거리고 있는 그 사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조차 참고 보기 어려운 일 같았다. 바위 결을 살펴 정을 대면서도 틈틈이 우스갯소리로 구경하는 사내의 무료를 달래주다가 힐긋 주위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어이. 서 있기 고단할 텐데 저기 앉아 좀 쉬는 게 어때?”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은 자신들이 깨고 있는 바위 한 모퉁이였다. 감시하는 진나라 병사가 자리를 뜬 걸 보고 권하는 말 같았다. 그런 그의 말투는 특별히 상대를 높이고 있지는 않았으나 태도는 몹시 은근하면서도 공손한 데가 있었다.
받들고 섬기는 품이 정성스럽기는 망치를 들고 일하던 사내 쪽이 훨씬 더했다. 쉬지 않고 휘두르던 망치를 문득 내려놓더니, 목에 걸치고 있던 베 수건을 풀어 바위 한쪽 반반한 곳에 깔았다. 그런 다음 생김과는 딴판인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때까지도 빈둥거리며 구경만 하고 있는 사내에게 권했다.
“형님, 이리 와 앉으십시오.”
마치 지체 높은 대부(大夫)를 모시는 사인(舍人)과도 같았다. 그런데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은 두 사람으로부터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상대편 사내였다. 분명 비슷한 처지인 듯한데도 당연하다는 듯 그런 그들의 받듦과 섬김을 받아들였다.
“그럴까.”
하면서, 한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깔아놓은 수건 위에 앉았다.
염량(炎凉)이 없는 건지 둔감한 건지 모를 그 사내, 그가 바로 뒷날 한(漢)제국 400년을 열고 고조(高祖)로 추앙받게 될 사람이다. 그의 성은 유(劉), 이름은 방(邦)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기실 방이란 이름은 나중에 그가 천자가 된 후에야 지어지고 쓰였다.
따라서 그가 함양으로 부역을 간 그때는 아직 이름조차 없었다. 다만 관례(冠禮)때 받은 계(季)란 자(字)가 있었을 뿐인데, 그것도 막내라는 평소의 호칭을 문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서른을 넘긴 그때까지도 그를 부르는 말은 “유가네 막내”라는 뜻의 유계(劉季)뿐이었던 셈이다.
그는 사수군 패현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 사람으로, 출신이 한미한 것은 부모의 이름으로 미루어봐도 잘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사서(史書)에조차 태공(太公)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만의 이름이 아니다. 태공이란 ‘어르신’ ‘영감’ 정도의 뜻으로 당시 나이든 남자에게 일반적으로 붙이던 존칭이었다.
어머니 유오(劉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서에는 그게 이름처럼 나와 있으나, 오(오) 또한 ‘할머니’ 또는 ‘할멈’이란 뜻으로 나이든 여자에게 붙이던 민간의 존칭이었다. 따라서 태공이나 오를 이름으로 본다면 둘 다 좀 이상한 이름이 된다. 곧 유계의 아버지 이름은 ‘유 어르신’, 어머니 이름은 ‘유씨네 할머니’가 되는 까닭이다.
옛 사람들에게는 기휘(忌諱)라 하여 존귀한 이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적지 않는 관례가 있었다. 따라서 한(漢)의 신하인 사마천이 고조(高祖)나 태상황(太上皇)의 이름을 함부로 적을 수가 없어 기록에서 빠진 것이란 설명이 있으나, 아무래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들에게 이름이 있었다면 누구에겐가는 기억됐을 것이고, 그것은 다음 시대 사가(史家)들에 의해서라도 기록으로 정착했을 것이다.
사마천 또한 그 투철한 기록의 습벽으로 미루어, 그들에게 이름이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해 남겼을 사람이다. 실제로도 기휘의 관례 때문에 이름을 잃어버린 제왕이나 귀인(貴人)은 없다. 따라서 태공과 유오에게는 원래부터 이름이 없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고, 이는 그들의 신분이 미천했음을 아울러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곁들여 말하자면 이름이 없는 것은 유계의 형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록은 그 맏형의 이름을 유백(劉伯), 둘째형은 유중(劉仲)이라고 하나, 이 또한 그들의 이름은 아닌 듯하다. ‘유가네 맏이’ ‘유가네 둘째’ 란 호칭을 문자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유계(劉季), 곧 뒷날의 한고조 유방의 탄생설화는 그 한미(寒微)한 출신에 비해 자못 거창하다. 교룡(蛟龍) 혹은 적제(赤帝)의 아들이라는 암시를 주는 설정인데, 유계는 오히려 그 설정을 한 신념으로까지 끌어올려 일생 무슨 휘황하고 신비스러운 후광(後光)처럼 활용한다. 그 대략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그 시절 풍읍은 못과 늪이 많은 지대였다. 한번은 들일을 나갔던 어머니 유오가 큰 못 가에서 쉬다가 깜박 잠이 들고 말았다. 그런데 그 꿈속에서 스스로 적제라고 하는 천신(天神)을 만나 정을 통하게 되었다. 그때 맑던 하늘에서 천둥이 울고 번개가 번쩍이더니 갑자기 사방이 컴컴해졌다.
함께 들에 나와있던 태공은 쉬러간 아내 유오가 돌아오지 않을 뿐더러 갑자기 천둥이 울고 번개까지 치자 몹시 놀랐다. 하던 일을 내버려두고 아내에게로 달려가 보니 벌건 교룡(蛟龍)이 아내의 몸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 뒤 유오가 임신하여 낳은 것이 유계라고 한다.
이 설화를 해석하는 데는 먼저 천신과 교룡을 두고 두 가지 태도가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천신과 교룡은 존재하였으며, 유오는 정말로 그런 초자연적인 존재와 교접하였다고 믿는 쪽이다. 그때, 곧 지금으로부터 2천 몇 백 년 전의 중국은 아직도 신화와 전설의 잔영이 남아있던 시절로서 신들은 산이나 못, 바다 어디에나 존재했고 용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유오는 그 이전의 여러 위대한 제왕들을 낳은 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 신 또는 용과 교접하여 비상한 일을 하게 될 아들을 얻었다고 본다.
두 번째는 신이나 용 같은 그런 초월적 또는 초자연적 존재는 없으며, 무언가 사람 사이에 있었던 별난 일이 그렇게 신화적으로 윤색되었을 것이라 보는 쪽이다. 성(聖)과 속(俗), 종(種)과 유(類)를 달리하는 존재들 사이의 교접을 믿지 않는 이들의 태도인데, 가만히 살피면 그들 사이에서도 이 설화를 해석하는 태도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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