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귀한 것을 부수거나 흠집 내기 좋아하는[능범존귀] 이들의 속되고 야박한 해석은 유오와 교접한 교룡을 당시 부근의 소택지(沼澤地)에 숨어살던 범법자나 부랑자들로 본다. 그들 혹은 그들 중의 하나가 들일을 나온 농부의 아낙 유오를 겁탈했고, 태공은 힘에 눌렸거나 머릿수에 밀려 아내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 뒤 태공은 그 일을 괴로워하는 아내를 위로하고 아울러 무력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천신(天神)과 교룡(蛟龍)을 끌어들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남겨진 기록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훑어보면 그런 주장에서는 중국사에 대한 분별없는 악의나 천박한 안목 밖에 확인할 게 없다. 고조(高祖) 유방의 부계혈통을 그렇게 추정함으로써 중국사의 한 황금기를 연 한(漢)제국의 위엄과 품격을 은연중에 떨어뜨리고, 그 시대 사람들의 윤리의식을 터무니없이 얕봄으로써 그 역사까지 폄하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것을 위해 대륙문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과 주관적 해석을 억지스레 조합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기록에도 그 불행한 사건의 후유증으로 짐작되는 구절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 교룡이 실재하는 인간이면 태공은 중국사람에게 매우 모욕적인 욕설 ‘다이뤼모즈(帶綠帽子)’ 우리말로 곧 ‘오쟁이 진 남편’이 된다. 아무리 유교화(儒敎化)하기 이전이고, 또 성적으로 분방한 남방지역에서의 일이라 해도, 남자의 본성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많건 적건 그 일은 태공의 의식에 상처를 남겼을 것이며, 그 상처는 그때 생겨난 의붓자식 유계나 결과적으로 부정을 저지른 것이나 다름없게 된 아내 유오에게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태공이 막내 유계를 차별해 기른 흔적은 없고, 특별히 유오를 구박한 일도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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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뒷날 유계가 커서도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저잣거리로 나가 빈둥거릴 때는 태공도 잔소리깨나 한 듯 하다. 그러나 부자 사이의 친자관계(親子關係)가 의심받을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었다. 유계에게 아무런 원망이 남아 있지 않을 뿐더러 나중에 황제가 되어서는 그 일로 태공과 이런 농담을 나누기까지 한다.
“전에 아버님께서는 늘상 내가 재주 없어서 생업을 꾸려가지 못할 것이며 둘째 형[劉仲]처럼 노력하지도 않는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습니까? 내가 이룬 업적이 둘째형에 견주어 모자랍니까?”
오히려 가족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응어리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면 맏형 유백(劉伯)의 아들들을 대하는 유계의 태도이다. 나중에 천하를 얻은 그는 형제의 아들들을 모두 제후(諸侯)에 봉했지만 유백의 아들만은 못 본 체했다. 하지만 까닭을 캐보면 그것은 순전히 맏형수에 대한 감정 때문이었다.
아직 백수 건달로 떠돌던 시절의 어느 날 유계는 대여섯 명의 벗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맏형수에게 식사를 청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무 대꾸 없이 주걱으로 솥바닥을 긁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으로 거절을 대신했다. 그러나 벗들이 돌아가고 난 뒤에 유계가 솥뚜껑을 열어보니 안에는 열명은 먹을 만한 밥이 남아있었다. 결국 유계가 유백의 아들을 써주지 않은 것은 그 어머니 되는 맏형수가 싫어서였지, 부계혈통이 다른 형제 사이에 맺힐 법한 응어리 탓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한고조가 만년에 보인 효성은 유별난 데마저 있다. 황제가 닷새에 한번씩 태공의 처소를 찾아 문안을 올리자 신하들이 천자의 위엄을 들어 말렸다.
“하늘에는 해가 오직 하나 뿐이며, 땅에는 두 명의 임금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집안에서는 자식이 되지만 천하 모든 백성에게는 임금이 되시며. 태공께서는 사사로이는 폐하의 아버님이시지만 천하로 보면 또한 폐하의 신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임금이 신하를 배알하러 갈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황제는 태상황(太上皇)이란 그때까지 없던 칭호를 지어 태공에게 올리고 계속해서 그 처소로 문안을 다녔다. 그와 같은 한고조와 태공 어느 쪽에서 의붓아버지와 씨 다른 아들 사이의 어두운 그늘을 찾아볼 수 있는가.
따라서 유오의 몸 위에 있었던 교룡을 도둑놈이나 떠돌이 거지로 만들 때 생기는 그러한 난점 때문에 다른 해석이 생겨났다. 설정이 소박하다 못해 유치한 구석까지 있지만, 이 탄생설화 자체를 만만찮은 정치적 야망과 배려가 깔린 상징조작으로 보는 게 그렇다. 누군가 당시에 널리 통용되던 세계해석 체계를 빌려 유계의 삶에 심상치 않은 예감을 품도록 일련의 신화를 꾸며냈다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대개 그게 태공이 아닌가 의심한다. 비록 한고조의 일생을 관통하는 신화를 총체적으로 짜낼 능력은 없었지만, 적어도 처음 구상한 사람은 태공으로 보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다시 말해, 교룡 이야기는 늦게 본 막내아들에게 신분상승의 비원(悲願)을 건 태공이 아들의 생김과 신체적 특징을 살펴 치밀하게 구성한 신화의 첫머리라는 뜻이다.
유계의 얼굴이 용을 닮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몸에 있었다는 점의 숫자인 일흔 둘[七十二]도 아무렇게나 지어진 숫자가 아니다. 얼치기 방술사(方術士)에게서 들은 것인지, 태공 자신의 음양가(陰陽家)적 교양인지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일년 3백 6십일을 다섯으로 나눈 수이자 나중에 유계가 자신의 명운(命運)으로 주장한 오행(五行)의 토(土)를 나타내는 수이기도 하다.
또 유계는 뒷날 자신을 적제(赤帝) 혹은 적룡(赤龍)의 아들이라고 하여 붉은 색[赤]을 숭상하였다. 그것은 바로 토(土)의 색깔로서 왕조의 흥망을 따질 때 펼치는 당시 음양가들의 이론과 너무도 잘 맞아 떨어진다. 진(秦)나라는 문공(文公)때부터 금덕(金德)을 지닌 백제(白帝)를 제사하였으므로, 화덕(火德)을 지닌 적제(赤帝)의 아들에게 멸망 당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오행(五行)에서 불은 쇠를 이긴다[火克金].
유계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하지만 농부로 자란 손위 형들과는 다소간 다른 성장 과정을 겪었던 듯하다. 먼저 마흔이 가깝도록 건달로 살아갔다는 것은 유계가 농사일을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또 뒷날 시험을 보아 하찮지만 정장(亭長) 벼슬이라도 한 걸 보면 많건 적건 글을 배웠음을 알 수 있다. 둘 다 당시 중양리 같은 시골 농투성이 아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유계의 인격형성에 있어서도 태공의 감추어진 조탁(彫琢)이 있었던 듯하다. <사기(史記)>는 유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람됨이 어질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으며 탁 트인 마음에 언제나 넓은 도량을 가지고 있었다. 평소 원대한 포부를 품어 상민(常民)의 생업에 얽매이려고 하지 않았다.”
<한서(漢書)>를 비롯한 다른 기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거기서 말하는 미덕들 또한 정성들인 조장이나 격려없이 절로 길러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 격려와 조장 역시 대개 아버지 태공으로부터 왔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리고 그 밑바닥에는 태공이 안간힘을 다 써 남몰래 확보해준 정신적인 여유와 생업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었을 것이다. 태공은 마흔이 가깝도록 빈둥거리는 막내를 집에 붙여두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그 처자까지도 거두어 보살펴 주고 있다.
다 자란 뒤의 유계는 중양리를 떠나 풍읍이나 패현 저잣거리로 나가서 놀았다. 아버지와 형들을 거들어 농사일을 하지 않을 바에야 중양리는 그가 날을 보내기에 좋은 곳이 못되었다. 거기다가 중양리는 한갓진 농촌이라 말을 섞고 뜻을 나눌 사람이 흔치 않았다.
풍읍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제법 큰 거리지만, 유계가 주로 세월을 보내는 곳은 패현 저잣거리였다. 아마도 부근에서 그래도 정치라는 것이 이뤄지는 현청(縣廳)이 거기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무얼 보았는지 이내 유계는 관리라면 현령(縣令)부터 서리(胥吏)까지 모두 우습게 보았다.
유계가 처음 패현 저잣거리를 어슬렁거리자 먼저 자리잡고 있던 장돌뱅이나 건달들은 인근 시골 촌놈들에게 늘 그래왔듯 텃세를 부리려들었다. 하지만 유계가 그들 때문에 무슨 호된 곤욕을 치른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의 신비한 친화력(親和力)이 강조된 전설이나 기록이 많다.
어떤 이는 그 친화력의 근원을 용을 닮았다는 유계의 얼굴 모습에서 찾고 있다. 모질게 마음을 다잡고 시비를 걸었던 왈패도 한번 그 맺힌 데 없이 넉넉한 얼굴을 대하기만 하면 일시에 모든 맥이 풀려버리기라도 한 듯 적의와 투지를 잃고 말았다고 한다. 그 대신 까닭 모를 푸근함에 이끌리어 되레 유계가 불러주기를 기다리며 그 주위를 맴돌게 되기 일쑤였다.
따라서 뒷날 패현에서는 유계의 나타남 자체가 이미 하나의 작은 사건이 되었다. 그가 성안 거리로 들어서면 구석구석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하나둘씩 그 곁에 붙어 짧은 골목길 하나 지나는데도 대여섯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자리잡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급히 해야할 일이 없는 건달들은 모두 그리로 몰려들어 와글거렸다.
얼른 보면 위험하고 불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사람 사이의 끌어당김과 쏠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유계는 학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말주변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패거리를 짓고 힘쓰기를 좋아해 소란을 일으키는 법도 없었다. 그저 어디건 자리잡게 되는 곳에 한껏 편안한 자세로 앉는다. 그리고 따라온 이들이 저희끼리 둘러앉아 하는 양을 알 듯 말 듯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워낙 종사하는 생업이 없고, 아버지인 태공 또한 그런 놀자판까지 뒤를 댈 만큼 넉넉하지는 못해 유계는 늘 빈털터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이끌려 몰려드는 건달들도 그보다 형편이 크게 낫지는 못했다. 다만 유계가 좋아 있는 것 없는 것 긁어 나오기는 했지만 가진 것은 모두가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 건달들이 주머니를 털어 하는 술추렴이랬자 끝이 뻔했고, 알고 지내는 저잣거리 사람들이나 하급 현리(縣吏)들 신세를 지는 것도 한 두 번이었다. 이도 저도 다 막히면 마지막으로 유계는 왕씨네 할머니[王M]나 무씨 아주머니[武負]네 술집으로 가 외상 술을 마셨다. 그리고 취하면 술집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잠을 잤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유계가 그렇게 자고 있으면 그 몸 위에 용이 나타나 휘감듯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유계 자신이 한 마리 용이 되어 드러누워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와서 외상 술을 마시는 날은 그 집의 술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팔렸다. 따라서 그런 일들을 신기하게 여긴 그 두 술집에서는 연말이 되면 외상장부를 찢어버리고 밀린 술값을 받지 않았다.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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